<리뷰>96 이 사람-망명설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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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어머니!라고 불러보자.그는 언젠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날아들 어머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아무래도 미국 어딘가에 있을 것 같건만 아직은 종무소식이다.
어머니 성혜랑과 이모 성혜림.성혜림은 북한 김정일의 첫 여자다.그러니까 그는 김정일의 처조카가 되는 셈이다.그런 그는 이한영(32)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평양.모스크바.제네바등에서 귀족생활을 하다 미국으로 돌린 발길이 끝내 한국행 으로 바뀐 우연의 남자다.
82년 10월 어느날의 서울 첫밤.그는 반포 40평 남짓의 아파트 안가(안전가옥의 줄임말)에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억!' 답답함에 현기증까지 들이닥쳤다.천장 낮은 집,아파트였다.그것은 이한영의 파란만장 서울생활을 예고하는 신호였 는지도 모른다.“이건 약속과 다르다.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 이틀 뒤그는 성북동 천장 높은 단독주택 안가로 옮겨져 조사도 받고 정착준비도 했다.
남산 천장 낮은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그리고 천장 높고 어리어리한 룸살롱에서 여자와 함께 술도 마셨다.자본주의 정착교육이라는 명분이었는데 남의 혼을 빼려 작심한 듯 여겨졌다.그리고 천장 낮은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도 먹었고 높이 를 재기보다화려함에 먼저 압도당하는 백화점에도 가봤다.
83년 어느 여름날,조선민주주의공화국 공민 리일남은 대한민국국민 이한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주민등록증을 받아쥔 것이다.하지만 특별분양을 받은 집도 역시 천장 낮은 집,아파트였다. 이듬해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공부보다는 술마시고 노는게 신났다.그러자니 1억원 정착금 이자로만 생활하긴 너무 빠듯했다.정기예금 원금을 건드렸다.돈은 금방 동났다.급조된.대한민국 이한영'은 비틀거렸다.
급기야 자살결심으로 이어졌다.강남에서 술을 마셨고 수면제를 챙겨 여관에 들어갔다.유서를 썼다..내가 그리던 자유는 이런게아니었다'는 요지의 글을….그리고 혼잣말로 온세상에 대고 욕을했다.약을 먹었다.눈을 떴다..며칠이 지났는지 '이틀전의 그 여관방 낮은 천장이 여전히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잠시 그의 말을 옮기자.“아파트 그 낮은 천장에 질식당할 것같았던 첫 인상에서 잘 사는 서울의 허상을 봤던 것 같다.내가과거 너무 화려하게 살았던 탓일 것이다.”그의 말에서 별안간 김원일의 대표작“마당 깊은 집”이 떠올랐다.분 단의 아픔을 담은 상징적 공간 마당 깊은 집 말이다.하기야 천장 낮아도 마당이라도 깊다면야 사정은 다를게다.그런데 아파트엔 마당이라곤 없으니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사회생활을 KBS 국제방송국 러시아어반에서 시작했다.87년 12월이었다.이듬해엔 모델출신의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는행운도 누렸다.
천장의 높이를 잠시 잊을 즈음,그를 억누르는 또 다른 사건이돌출했다.89년 러시아 출장과 미국여행이 좌절된 것이었다.주민등록증 발급때부터 출국정지명령이 걸려 있었던 줄은 미처 몰랐다. 천장 낮은 남한 사회.그는 직장주택조합에 관여하면서 배운 노하우로 사업을 하기로 했다.90년4월 그는 사표를 던지고 주택건설과 광고이벤트를 사업목적으로 한 인터커넥션이라는 회사를 차렸다.곧장 착수한 조합주택사업은 순조로웠다.무려 24억원의 거금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무엇보다도 반포에 저택을 구입할 수있어 좋았다.정말 그리웠던 .천장 높은 집'.
하지만 곧 이어 그는 고발됐다.조합원들이 수익금 24억원을 정산.배분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댄 것이다.93년3월 구속영장이 떨어졌고 서울구치소에 감금됐다.“이름 이한영,전직 사업,죄명 횡령”.수감번호.1421'.1심 징역 3년.온 갖 탄원도 다 공염불이었다.그의 재산은 다 날아갔다.변호사를 댈 재간도 없었다. 94년1월10일 그는 서울고등법원 법정에 섰다.2심에서 무죄판결이 떨어졌다.“피고는 분양자다.그래서 수익사업을 할권리가 있다.따라서 피고가 챙긴 돈은 수익금이지 횡령이 아니다.” 이 말에 그는 울면서 고개를 쳐들었다.법정의 그 높은 천장이 돌고 있었다.재판장의 판결문이 다시 머리를 맴돌았다.아내는 졸도했고 장모의 통곡은 좀처럼 그칠 요량이 아니었다.
그는 생활방편으로 수기를 통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언론사를 기웃거리며 어머니 성혜랑과 이모 성혜림의 망명 가능성을 내비쳤다.그리고 이어졌던 일련의 해프닝들….
잠시 그의 말.“당국에선 나를 자본주의 못된 것만 배운 골치아픈 놈으로 간주하고 있는 줄 안다.스스로도 그런 면이 있음을많이 털어놨다.천장 얘기? 비단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나마 천장 높게 대우해 줬더라면 이런 수렁에는 빠 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그는 그런 집을 찾아 14년을 뒹굴었던 남쪽 땅마저 버릴 것을 궁리중이다.그리고 지금도 남쪽으로 찾아드는 많은 귀순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묘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환영행사의 와중에서도.행여 저들도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치여 다치지나 않을까'하는 일말의 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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