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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공기업 '무늬만 개혁'은 개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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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발이 넓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들었음 직한 이야기가 있다. 서울 근교 식당들과 고객 사이에 영수증을 둘러싼 모종의 거래가 자주 이뤄진다는 것. 손님들이 식사대금을 실제보다 높게 신용카드로 결제하면서 그 차액을 식당주인과 나눠 갖는 일이 많다고 한다. 요즘처럼 불경기에도 이처럼 가욋돈이 생겨 그런대로 가게가 굴러간다는 어느 주인의 비밀스러운 고백을 직접 듣고서야 그 소문이 사실로 여겨졌다. 서울 시내 몇몇 매점이나 요리점에서 간혹 그런 식의 거래와 분배가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흘러다니긴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일부 기업인이 신용카드 결제를 통해 마련한 '용돈'의 규모가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또 놀란 것은 중앙이나 지방의 일부 공기업 인사들조차 그런 묘책을 통해 용돈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런 비리를 잡기 위해 사기업이나 공기업이 5월 야유회나 단합대회 등을 치르면서 지출하는 경비가 신용카드 결제를 통해 부풀려 나갔는지를 현장점검한다면 종업원들이 그런 망신과 불신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회사는 어떤 형식으로건 감독과 감시를 강화하고 예산도 쥐어 짜는 모양새를 갖출 것이다.

거의 모든 공기업은 이른바 사외이사제도를 통해 밖에서 듣는 비판적 견해들을 경영에 반영하려고 한다. 어떤 공기업의 경우 이사회가 특정 주제를 가지고 격론을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쩌다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대부분은 집행부로부터 브리핑을 받거나 또는 현장시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외이사들은 출신 지역별.전문 영역별로 적절하게 배치되었으며 놀랄 만큼 '균형'이 갖춰져 있다. 거의 모든 인사가 특정 지역 또는 특정 학벌에 편중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게 구색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임 역시 '투명하게' 구성된 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 확정되었다.

그래서 어느 공기업이나 "우리는 가장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사외이사들이 구성되고 이사회에서 주요 경영방침을 결정한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스템 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공기업들은 가격을 결정하는 내외의 자문기구와 인사를 자문하는 것 등을 포함한 수많은 위원회를 두었다. 골치아픈 거의 모든 문제들은 이처럼 심의 또는 자문기구를 거쳐 투명하게 확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장은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정부가 청년실업 대책으로 공기업 일자리를 늘리라고 하면 경영에 큰 부담을 주건 안 주건 관계없이 거기에 따르는 것이 속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은 정부 쪽으로 미루면 된다. 공기업의 최고간부들은 책임질 일을 너무 많이 분산시켰다.

사장 등 임원도 모든 비용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니 비자금 의혹을 받지 않아 좋고 곤혹스러운 외부청탁도 공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외이사들이 앞장서 막아주니 이제 가슴앓이 할 것도 없다. 노조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다. 그래서 때로는 노조의 무리한 요구에 굴복하는 공기업 사장이 나타나고 그가 무능할수록 노조의 요구는 거세진다. 감사원 감사에서 그런 일을 적발당한 공기업 사장도 있었다.

효율을 따지지 않는 공기업의 '공정.투명 경영'은 과연 선(善)인가, 악(惡)인가. 모양새만 갖춘 투명한 경영, 책임도 지지 않고 소신도 없는 일부 공기업 경영시스템이 개혁과 형평이라는 미명하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결코 시장경제가 아니다. 그건 분명 악이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