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인질극 대거석방 무엇을 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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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페루 일본대사관저를 점거하고 있는 게릴라들이 점거 6일째인 22일밤(현지시간) 페루정부 인사들을 제외한 인질들을 대거 풀어준데는 여러가지 계산이 복합적으로 깔려있다.
우선 인질극으로 전세계에 자신들의 실체와 요구사항을 충분히 알리는 엄청난.정치적 이득'을 올린 이상 대규모 인질을 계속 잡아두는 것은 여론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판단한 것같다.
후지모리 대통령이 계속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는 점을의식해 무력진압 명분을 미리 제거하겠다는 계산도 포함돼 있다.
.사무라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강한 성격의 후지모리대통령이강경 진압을 공언한 만큼 게릴라측으로서도 부담 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인질들의 추가석방이 페루정부와의 모종의 협상에 따른 조치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현지에서는 게릴라들이 정부관리.국회의원.군장성등 필수요인만 인질로 잡고 신변안전이 보장된 남미의 제3국으로 이동,그곳에서투쟁을 재개하기로 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게릴라들은 이를 위해 거추장스런 일반 인질들을 석방,몸을 가볍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물론 이같은 소문에 대해서는 게릴라측도,정부측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인질로 잡혀있는 산드로 펜데스 전노동장관이 이날 대사관저 앞에서 대독한 게릴라측의 성명에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영웅적인 최후를 각오하고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돼있는 점도이같은 부인을 뒷받침하고 있다.
어쨌든 게릴라들의 인질 대거 석방조치는 이번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실마리라기보다.메인 게임'으로 돌입하는 신호탄으로봐야한다는 지적이 우세하다.한마디로 사태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전망인 셈이다.
이번 사건으로 후지모리대통령은 .트릴레마'에 빠졌다.좌익게릴라들을 소탕,정치.사회적 안정을 이루고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었다는 점을 큰 치적으로 내세워온 그로서는 국내의 강경 진압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다.미국의.절대 양보불가 '방침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그러나 사실상.형제국'이나 다름없는 일본의.딱한 입장'을 무시하기는 더더욱 어려워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계속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도 없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이번 사태에 후지모리의 다음 대응 수순이 주목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리마=김동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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