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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통합’을 말하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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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지만 자욱했던 포연이 가라앉고 난 뒤 유서 깊은 도시 시카고의 그랜트 파크에 선 그의 메시지는 달라져 있었다. 오바마의 당선 후 첫 연설에는 ‘변화’에서 진화한 ‘우리(We)’, 즉 통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제가 대통령으로서 내리는 결정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며 우리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항상 솔직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 의견에 귀 기울일 것이며(I listen to you), 저희 의견이 충돌할 때 더욱 귀 기울여 들을 것을 약속합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표현은 다르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인이 제일 먼저 대중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통합이었다. 221년 미국 역사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기록될 오바마에게 ‘통합’의 메시지는 누구보다 절실했을 게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 오바마의 시카고 연설이 바다 건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크다.

돌아보면 우리 대통령들도 출발점에선 누구나 통합을 강조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가 그랬다.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합니다. 저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겠습니다. 국민 통합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우리는 마음만 합치면 기적을 이뤄내는 국민입니다. 항상 국민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어딘가 뜨끈하지 않은가. 잔인할지 모르지만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도 보자.

“지난 10년 더러 멈칫거리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이제 실패의 아픔까지도 자산으로 삼아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룩하는 데 나와 너가 따로 없고, 우리와 그들의 차별이 없습니다. 저 이명박이 앞장서겠습니다.”

변명도 있을 게다. ‘앞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 천하의 오바마라도 별 수 없을 거다. 정치는 현실이다. 바둑에도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내 돌이 먼저 산 뒤에 남의 돌을 공격한다)란 말이 있질 않은가. 내 편부터 챙기는 건 표로 당선된 정치인의 숙명이다’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지지 기반이 취약해질수록 만만한 고정 지지층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통치 기간과 지지율이 반비례한다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저 그런 대통령과 역사책이 평가하는 지도자의 차이는 바로 이 점이다. 통합을 말로 읊는 지도자와 실천하는 지도자는 천양지차다. 명분보다 실적이 더 중요한 CEO 리더십이나, 집단보다 개성이 더 중요한 문화 리더십과 달리 정치 리더십의 궁극은 통합이다.

집권 첫해를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한나라당에선 지금 공신들을 요직에 전진 배치하자는 친정체제 구축론이 무성하다. 청와대 일부에서도 솔깃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청와대의 프레임과 집권당의 프레임은 달라야 한다. 청와대의 관심은 현재 권력의 완성이지만 정당은 미래 권력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지금 청와대가 귀 기울일 곳은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현장의 소리다. 거기엔 ‘나와 너가 따로 없고, 우리와 그들의 차별이 없다’. 오바마가 당선 연설에서 “이건 제가 아닌, 당신들의 승리”라고 한 말이 귓전을 때리는 이유다.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