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일 선생은 바둑 정진을 위해 시골집 안방의 가운데를 하얀 광목으로 막아 부인과 별거(?)했다고 한다. 그런 집념을 지닌 노장이 아직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기사와의 대국에 온종일 시간을 쏟아붓는 광경도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불가항력이다. 얼마 전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의 한국 대표를 보니 25세 이세돌 9단이 가장 연장자였다. 새로 입단해 얼굴도 이름도 낯선 젊은이들은 어수룩한 신참이 아니라 이세돌급마저 가끔 격침시키는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젊은 기사와 만나면 아예 이길 희망을 품지 않는다. 한 노장 기사는 이렇게 토로한다.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마음 한구석엔 아직 승부에 대한 뜨거운 욕구가 있다. 하지만 가끔은 단지 대국료를 받기 위해 나왔나 생각이 들어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다.”
몇 년 전 ‘시니어 리그’ 창설 논의가 있었다. 50대 이상의 노장 기사만 출전하는 대회를 작은 규모로 10개 정도 만들자는 게 핵심이었다. 조훈현도 이창호도 언젠가 늙을 텐데 그들 영웅이 소년들에게 판판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과연 좋을까. 그러니 판을 따로 만들자는 얘기였다. 고령화 사회에선 노장 기사들도 할 일이 늘어난다. 그걸 대비해 TV 해설도 노장들이 하며 더 늦기 전에 얼굴을 알려두자고 했다.
30대 중반만 넘어서면 토너먼트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시니어리그는 프로기사의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둑적 인생’에 관한 얘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니어 국수전’이 시작되고 대진표가 벽에 걸렸다. 상대를 확인해 보니 젊은 시절 숱하게 맞붙었던 그 친구 아닌가. 대포 한잔도 마다하고 집으로 직행해 인터넷을 열고 최근의 명국들을 놓아본다. 신형 정석도 익힌다. 대국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긴장이 서려 있다. 그러고는 전력 투구. 이기니 즐겁고 패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런 승부와의 호흡이 프로기사가 유지해야 할 바둑적 인생이 아닐까. 이런 바둑적 인생이야말로 프로기사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아닐까. 늦은 감이 있지만 시니어리그가 다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
박치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