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서산 연암산 천장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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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제비날개 모습인 연암산(燕巖山)에 이르자 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비탈길을 산행하려고 하는 나그네는 걱정이 앞서기만 하고.며칠째 사람의 발길이 끊긴 것같다.눈 쌓인 길 위에 사람의 발자국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백제 무왕33년(633년) 담화(曇和)선사가 창건했다는 천장암(天藏庵)이다.그런데 암자의 역사는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고,조선말의 선승 경허(鏡虛)스님의 일화만이 암자의 곳곳에 서려있을 뿐이다.
나그네는 몇년전 여름에 경허스님이 묵었다는 골방과 좌선을 했다는 암자 왼편의 제비바위를 봤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경허스님의 세 제자인 수월(水月).혜월(慧月).월면(月面.滿空)이 묵었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던 것이다.수월은 북쪽에 서,월면은 중부에서,혜월은 남쪽에서.자비의 달'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수월은 이름을 숨긴 채 백두산 부근에서 살았는데,오가는길손들에게 짚신을 만들어 신겨주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눈길에 몇번 헛발질하며 고개를 올라서자 성긴 눈발 저편에 암자가 보인다.마치 경허스님이 거기 있기라도 한듯 반갑고 가슴이설렌다. 암자는 그대로 선경(仙境)이다.법당의 참배를 뒤로 미룰 정도로 눈(雪)이 연출하는 풍경에 도취되고마는 것이다.붉은단풍잎에 얹힌 눈꽃의 색채 대비도 절묘하고,7층 돌탑에 쌓인 눈이 솜옷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다.
문득 나그네의 눈에는 7층 돌탑이 누더기를 걸친 경허스님처럼다가온다.그도 그럴 것이 경허스님은 대나무 숲이 가까운 저 골방에서 1년3개월 동안 돌탑처럼 묵묵히 앉아 장좌불와했다고 한다. 그사이 단 한발짝도 밖을 나선 적이 없는 스님의 몸과 머리에는 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던 것이고.
마침내 경허스님은 문을 박차고 일어나 이가 들끓던 누더기를 벗은 채 방안에 있던 주장자를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그후 어느날만공은 방안에 누워 있는 경허스님을 보고 깜짝 놀란다.스승 경허의 배 위에 독사 한마리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 이었다.“스님,배 위에 독사가 있습니다.” 그러자 경허스님은 놀라지도,쫓지도 않고 이렇게 말한다.“내버려두어라.실컷 배 위에서 놀다 가도록 내버려두어라.” 바로 그 방 입구에는 밀짚모자가 하나 걸려 있다.
산언덕에선 스님들이 눈발 속에서도 쇠스랑을 들고 일하고 있으며,공양주 노보살은 나그네 일행을 위해 콩을 넣어 밥을 짓고 있고,사람의 훈기가 느껴지는 설경(雪景)이다.
사실 경허스님의 무애행을 흉내내기보다.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말라'는 선가의 청규를 먼저 지킬 일이다.
일하는 스님의 모습이 믿음직하고 선명하게 그린 공양주 노보살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아름답지 않은가.
*서산시고북면 소재지에서 5㎞의 거리에 있으며 암자 입구까지승용차로 20분정도 걸린다(0455-63-2074).
글 =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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