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中> 중산층 "노후 걱정” … 저소득층 "밥벌이가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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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 부부는 오래전 정년퇴직의 꿈을 접었다. 그는 “10년 안에 노후 대비를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진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난해 대학원(외국어 전공)에 입학했다. 인생 2모작을 위한 준비다. 질병이나 사고에 대한 걱정이 있기는 하지만 대비책을 세워뒀다. 월 55만원씩 매달 4개 보험을 들고 있어 든든하다.

일용직인 김모(44·서울 구로동)씨에게 닥친 위험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전신에 59%의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 화상은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병원에서 연결해준 후원금으로 치료를 하고 올해 6월 퇴원했지만 아직 1억여원의 치료비가 밀려 있다.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매달 100만원의 국가보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겐 갚을 길이 막막하다. 그는 외환위기로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나 월세 20만원짜리 단칸방으로 옮긴 후에도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아내 이모(37)씨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꿈을 갖고 밝게 살아온 남편”이라며 “화상을 입은 후 이젠 꿈마저 접었다”고 낙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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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소득에 따라 걱정하는 위험의 종류가 다르다.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받는 충격도 다르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중앙대 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월소득 500만원 이상은 5.5%가 가족의 질병이나 사고로 빚진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소득 200만원 미만의 계층에선 8%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소득이 높은 계층은 각종 질병이나 사고에 대비, 보험에 많이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보험 가입률은 고소득층이 69.5%, 중간계층이 58.6%, 저소득층이 40.6%였다.

◆중산층은 노후가 가장 큰 위험=장덕진 서울대(사회학) 교수는 “저소득층일수록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잦고, 대비책이 약해 피해가 커진다”고 말했다.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한번 위험에 빠지면 위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능력이 떨어져 양극화가 심화된다.

소득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위험을 걱정한다. 건설과 해외인력공급 사업을 하는 최성재(54·서울 방이동)씨의 소득은 월 4500만원 정도다. 그는 최근 국세청이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은 사람의 골프장 회원권을 압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최씨는 종부세·자동차세 등 모든 세금내역을 다시 들여다봤다고 한다.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까지 챙겼다. 그는 “그런 일을 당해 사교모임에 알려지거나 해외 출장·여행을 가려다 공항에서 뒤돌아서는 일이 생기면 얼굴을 들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사회적 인식이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위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최씨 역시 다른 응답자들과 마찬가지로 노후를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로 생각한다. 최씨에게 노후 대책은 현재 누리는 사회적 평판도를 유지하는 것이 초점이다. 그는 최근 지방에 1000여 평의 땅을 구입하고, 해외 골프장 회원권을 샀다. 최씨는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건강에 별 문제가 없다고 자신한다. 월 250만원 정도 내는 민간 보험이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을 막론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일할 수 있는 실버잡 창출정책이 절실하다”며 “이렇게 되면 노후에 소득계층 간 격차가 좁아지고 내수 진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 위험 관리 정부 몫”=이번 조사에서는 또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노후, 전염병, 화재, 교통사고 등 각종 위험에 더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화재에 대해 중졸 이하 학력자의 45.8%가 갈수록 위험하다고 응답한 반면 대학 중퇴 이상자는 25.6%만 위험 요소로 봤다. 중졸 이하의 사람은 52.3%가 운없는 사람이 사고를 당한다고 했지만 대학 중퇴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36.7%가 위험을 운으로 돌렸다.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위험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민들이 처할 수 있는 위험 가운데 많은 부분을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박사는 “경제 위기상황이 닥치면 외환위기 이후 얇아진 중산층이 더 얇아지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중산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가장 미흡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확대하고 근로자뿐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긴급구호제 등을 도입, 중산층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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