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역설의 시대 살아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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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정권에서 남들이 인플레 없는 성장이라는 유례없는 호황을 즐기며 성큼성큼 황새걸음 걸을 때 우리는 공연한 과거사를 들추며 스스로 뱁새가 돼 종종걸음쳤다. 정권이 바뀌고 막 고개 돌린 우리는 또다시 전지전능하다던 ‘보이지 않는 손’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지구 곳곳에서 ‘합리적 선택’이라 포장된 수많은 ‘야생적 충동(animal spirit)’들이 허물 벗는 변태의 순간들을 눈 부릅뜨고 목격했다.

 우리 잘못이 아니라는데 우리를 향한 비수의 끝은 날카로웠다. 부자 만들어준다던 펀드는 반 토막만 났어도 가슴 쓸어내릴 형편이고, 달랑 하나 있는 아파트는 대출이자만 남기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미국에서 건너온 금융위기는 미국이 펴준 우산으로 진정되는 국면이라지만 그보다 더 추운 실물위기가 기다리고 있다니 벌써부터 가슴 시리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을 맞는다. 케인스가 말한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이다. 이웃 나라 일본이 몸으로 보여줬다.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유례없는 경기침체를 겪은 일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일본 국민은 주머니를 꼭꼭 여몄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저축을 늘렸다. 금리를 0%로 내려도 돈만 생기면 은행으로 달려갔다. 내수는 위축됐고 소득은 더 떨어졌다. 정부가 천문학적 재정지출을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런 불황이 10년을 갔다. 그게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닌 게 됐다. 그런 악순환을 예고하는 불길한 역설이 우리 눈앞에 닥쳤다는 말이다.

실제 우리의 내년 성장률이 1.1%로 떨어질 거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내년 글로벌 경제가 후퇴 국면에 돌입할 것이 분명한 만큼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될 거라는 얘기다. 환란 이후 최악의 상황인 각종 경제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니 어쩌란 건가. 내 지갑 가벼운데 불황 막겠다고 빚내서 펑펑 쓰란 말인가.

역설은 역설로 이겨낼 수 있겠다. 다행히 이번에는 위로가 되는 역설이다. “(기본적 생계가 충족되기만 한다면)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이스터린 역설(Easterlin paradox)’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1만5000달러에 이르게 되면 소득수준이 높아져도 행복지수는 더 올라가지 않는 ‘결별점(decoupling point)’에 이른다는 ‘디딜방아의 역설(경제성장의 효용체감 이론)’도 같은 얘기다. 실제로 1945~2000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배나 증가했지만 행복지수는 거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교수는 이를 ‘행복=소비/욕망’이라는 방정식으로 설명한다.

 결론을 내자면 이렇다. 행복은 소비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한다. 그런데 소비는 효용체감이 적용되는 만큼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을 최대로 키우는 방법이 된다. 한마디로 분수에 맞는 건전한 소비를 하면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는 삶을 살면 행복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추운 겨울 나기의 해법이며 사회 전체로도 불황의 터널을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극한 추위에서도 살아남고 영상의 날씨에도 얼어 죽는다.

뻔한 결론에 실망한 독자들을 위한 한마디: 당신의 분수에 맞는 소비생활이 세종대왕의 소비생활보다 훨씬 윤택할 수 있다. 그는 당신이 모는 소형차도 탈 수 없었고, 인터넷도 할 수 없었으며, 고춧가루가 든 맛있는 김치찌개도 먹을 수 없었으니까.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