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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놓고, 서울중앙지법 ‘소리없는 논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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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10면

서울중앙지법 서관 10층. 기자는 스크린도어 앞에 서 있다. 법원은 스크린도어로 변호사와 검사 등의 판사실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여직원이 카드를 대자 스크린도어가 열렸다. 이제 판사들의 세계다. 형사7단독 박재영(40) 판사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시법 10조 ‘야간집회 금지 조항’은 합헌인가 위헌인가

박 판사는 ‘촛불 재판’에 제동을 건 장본인이다. 그는 지난달 9일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이 낸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받아들여 선고를 연기했다. 다음날인 10일 같은 법원 형사3단독 엄상필 판사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며 구속기소된 진보연대 상임운영위원장 박석운(53)씨 등 2명이 낸 보석 신청을 받아들였다. 박 판사가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조항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와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인 제23조 1호다.

집시법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 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도 옥외집회를 허용할 수 있다.

박 판사는 이 집시법 조항이 “집회의 허가제를 금지한 헌법 제21조에 정면으로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정문에서 “옥외집회의 금지 시간(일몰 후 일출 전)이 하루의 절반이나 돼 예외적 규제로 보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고, 적지 않은 국민이 주간에 학업이나 생업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집회의 자유를 사실상 무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박 판사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에게 먼저 촛불집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집회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없다. 관심이 별로 없었다.”

-위헌제청 결정을 내릴 때 고민되지는 않았나.
“법원의 윗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판사로서의 양심에 따라 재판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이 계셔서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박 판사의 결정이 내려진 그날, 법원에선 국회 법사위 국감이 있었다. 한나라당 홍일표 의원은 박 판사의 사례를 들며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에게 “평소 젊은 판사들을 자주 만나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박 판사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한 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는 “내 또래의 판사라면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려대 법대 87학번으로 올해로 판사생활 11년째다. 목소리의 톤은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주관이 느껴졌다.

-위헌 제청에 앞서 다른 단독 판사들과 의견을 나눴는지.
“관련 조항의 위헌 여부를 놓고 판사들과 여러 차례 토론을 벌였다. ‘합헌’이라고 판단한 분도 적지 않았다. 내 결정문의 4분의 1가량에는 그런 분들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

실제 결정문 곳곳에는 “야간 옥외집회의 경우 공공의 안녕질서에 미칠 영향이나 법익 충돌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 “특별한 예외 규정으로서 헌법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는 등의 ‘해석’과 ‘견해’들이 들어가 있다. 박 판사는 이들 해석·견해에 일일이 반박을 달았다. 판사들 사이에 벌어진 합헌·위헌 논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결정문에는 ‘집회의 자유는 정치적 소수나 사회적 약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권’이란 대목이 있다. 그 취지가 궁금했다.

“약자 쪽에 보다 무게를 둬야 한다는 게 평소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권력과 시민사회의 힘이 비슷했다면 지금은 시민사회 쪽에 더 비중을 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튿날 다시 10층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형사 항소4부의 최정열(44) 부장판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항소4부는 16일 야간 촛불시위에 참가해 경찰차를 망치로 부수는 등의 혐의로 기소된 유모(24·대학생)씨 사건에서 야간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합헌’이라고 판단하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감색 카디건을 입은 최 부장판사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는 재판서류 넘기는 데 쓰는 파란색 골무가 끼워져 있었다.

-합헌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집회 전부에 대해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헌이라고 보기 어렵다. 야간집회를 어떻게 규제할지는 법 정책적인 문제라고 봤다.”

-시위 현실에 대한 판단도 했는지.
“시위 문화가 아직 성숙돼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촛불집회에서 나온 우려는 이해하지만, 정권 퇴진까지 주장하는 것은 과하다고 본다.”

-일부 판사는 재판을 헌재 결정 이후로 연기했는데.
“아직 위헌 결정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 않나. 현재 존재하는 실정법에 따라 처리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최 부장판사는 2006년 12월 인천지법 근무 당시 “교사들이 동료 교사의 파면에 반발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벌인 것은 교육권 침해”라며 학생과 학부모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보수냐, 진보냐 하는 잣대로 보지 말아 달라. 판사는 법리에 따라 판결할 뿐”이라고 했다. 판사들의 시각 차에 대한 법원 내부의 견해도 엇갈리고 있다. “그만큼 법원 조직이 건강하다는 뜻”이라는 시각과 “정치적 이념 대립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한다. 한 법원 관계자는 “박석운씨 등이 촛불 관련 집회에 참석한다면 보석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이란 강경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법원장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신영철(54) 원장은 홍일표 의원 발언이 있던 그 다음 주에 형사단독 판사들과 간담회를 했다. 이 간담회에서 신 원장은 “재판은 각자 판단에 따라 하는 것으로 일사불란하지 않은 게 법원의 힘”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 원장은 기자와 만나 “내가 뭐라고 말하면 판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입을 다물었다. 다만 “형사사건은 구속기한 내에 처리돼야 하는 만큼 헌재에서 가급적 빨리 결론을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관련 사건들도 2심, 3심을 거치면서 가닥을 잡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판사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앞으로도 계속해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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