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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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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팩션 열풍이 가실 줄 모른다. 알려진 대로 팩션은 역사적 사실(팩트)에 허구(픽션)가 더해진 서사 장르다. 최근 수년간 세계 문화계의 압도적인 트렌드가 되고 있다.

팩션 붐 뒤에는 역사관의 변화가 있다. “역사적 이해란 애초부터 일종의 재구성이며, 단순히 충실히 재생산하기만 하면 되는 역사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레몽 아롱)는 것이다. 사실(역사)과 허구의 이분법이 흔들리면서 역사 서술을 글쓰기나 원문학(archi-literature)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

팩션 작가가 역사가를 대치하는 경향도 보인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 반기를 들며 팩션 열풍을 주도한 ‘다빈치코드’는 아예 “우리가 아는 역사는 결코 신뢰할 만한 판본이 아니다”고 썼다. 팬들 역시 그런 역사 뒤집기에 환호했다. “역사는 허구화되고, 허구는 역사화되는 것”이다(박진). 팩션을 “SF, 판타지와 함께 포스트 모던한 감수성과 인식론적 상황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대의 두드러진 서사 장르”라고 쓴 박진은 “역사가가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의 흐름에 기승전결의 구조를 부여하고 개연성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서사화 행위의 주체라면(화이트 헤드), 팩션의 저자들이 역사가가 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물론 팩션은 번번이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린다. 명백하고 절대적인 ‘사실’을 믿는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또 일부 국내 팩션들은 그저 실존 인물의 이름을 따오는 데 그치거나 극적 재미를 위해 최소한의 역사적 정합성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바람의 화원’이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렸다.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은 “신윤복이 남장 여자라는 설정은 명백하게 잘못됐고, 국민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처럼 온 국민이 아는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뒤집어 버린 상상력의 발칙함이 이 드라마의 인기 요인이라는 데 역설이 있다. 팩션의 시대, 이미 역사는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상상하는 자의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는 이미지네이션(imagination·상상력)의 나라”(할리우드 로케이션 전문가 빌 볼링)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