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부부는 말이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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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관 부인이 1억7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는데도 남편인 장관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얘기가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흥분할 필요는 없다.흥분하기에 앞서 그럴 수도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선 부부간의 기(氣)불일치설.
“여보 당신 주무세요?” “….” (나는 당신이 잠못이뤄 하는 사정을 다 압니다.그 지겨운 선거운동,밑바닥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돈이 들어갑니다.신문에는 20당(當)10락(落)설이 보도되고 있습니다.상대방 후보는 선거자금을 풍성히 쓴다는 소문이 돕니다.당신의 입술 은 바짝 타들어 갑니다.그러나 안심하셔요.대한안경사협회 회장이 세차례에 걸쳐 갖다준 돈 1억7천만원이 있습니다.언 발에 오줌누기 같은 액수지만 이 돈을 선거운동에 쓰면 어떨까요.) 그러나 부인의 이런 고백은 이심전음(以心傳音)의 수법으로 말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부인은 기의 단련을 통해 이런 소리 전달법을 배웠다.순수한 마음으로 남편을 내조하는 정성이 지극하면 이런 경지에도달한 다고 한다.
문제는 남편.그의 기 단련 수준은 부인에 비하면 형편없다.이런 고차원의 채널을 통하는 의사전달 방법을 알지 못한다.결국 부인은 말했으나 남편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다음은 그들 부부가 우리 민법(民法)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모범부부이기 때문에 수뢰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는 설.
“당신이 선거에 많은 도움을 주어서 고맙소.수줍어서 남 앞에잘 나서지도 못하는 당신이 어려운 일을 해냈소.” “부부는 한몸이지만 호주머니는 다릅니다.우리 민법도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를 채택한지 오랩니다.내 돈은 내것,당신 돈은 당신 것입니다.그러나 부부는 의리와 은혜로 친하고 사랑해야 된다고 동양의 지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그래서 당 신을 도와준 것이니 돈의 출처는 묻지 마셔요.” 그러나 이런 두가지 설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은 세번째 설명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세번째 설명은 대통령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부인의 배려가 함구(緘口)의 원인이라는 설.그 사연은 이렇다.
“여보,대통령 각하가 나를 장관에 임명했소.” “축하해요,여보.이제 당신은 대통령께 인정을 받은 거예요.지난해말(94년말)에 대통령께서 한 말씀 생각나셔요.그는 곧 있을 당정개편에서다음과 같은 사람이 등용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가장 중요한 기준은 깨끗한 사람,즉 그 사람의 청렴도다.그리고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능력있는 사람,세계화 추진에 적합한 인물이면 더욱 좋다.'그러니까 당신은 청렴과 애국심,그리고 능력을 모두 인정받은 것이에요.” (그러나 여보 큰일 날 일을 저질렀어요.대한안경사협회에서 가지고 온 돈을 받았어요.억지로 놓고 가는데 안 받을 수가 없었어요.당신의 청렴을 믿은 대통령을 실망시킬까 두려워요.당신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너무나 두터워 같은 장관자리 에 두번씩 임명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겁니다.그런 그가 이 일을 알면 얼마나 참담하고 비통해 할까요.후일 이 일이 알려지면 제가 계를 하다 일을 그르쳤다고 하겠어요.그래서 당신에게 아무 말도 안한 겁니다.)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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