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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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는 지금 확실히 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장관부인이 돈을먹고 그 돈으로 남편의 선거운동까지 했는데도 남편인 장관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같은 안경사의 돈이라도 국회의원이 먹으면 죄가 안되고 장관이 먹으면 죄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국회의원이 먹은 돈은 검찰이 조사를 안하고도혐의가 없음을 미리 아는 시대에 살고 있다.외무장관이 왜 갈렸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다.국회의원이 본회의가 열리는 시간에 나가 골프를 쳐도 무방한 시대에 살고 있고,재산등록을 엉터리로 해도 그만인시대에 살고 있다.
부패추방을 간판으로 내거는 정부에서 한달사이 두 사람의 장관이 돈문제로 물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뉴스가 아니듯이 이제 각료가 돈을 먹었다는 건 뉴스가 아니다'이런 독설(毒舌)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네스 북 편집자의 눈이 밝다면 이 한달에만도 우리나라에서 몇개의 진기록을 발견할만큼 우리는 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부패추방으로 가고 있는가,부패 무방(無妨)으로 가고 있는가.기강확립인가,기강 확실(確失)인가.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판단불능 감각마비가 될 지경이다.현직장관이 돈을 먹는 판국에 부패추방이 되겠는가.돈을 먹어도 조사도 안 받고 본회의중에 골프를 나가도 아무 탈이 없는데 기강이 설 수가 있겠는가.
누구더러 기강을 말하고 누구더러 청렴을 말할 수 있는가.
아마 유치장.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군소(群小)도둑.소매치기.
잡범들은 말할 것이다.“우리가 몇푼이나 해먹었다고 이러는거요.
우리는 생계형(生計型)에 불과할 뿐이오.그 좋다는 장관이나 의원을 하면서도 그렇게들 자신다는데 그분들은 놔두고 왜 우리만 죄주는거요.” 여기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며칠전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가 말했다.“지금도 먹고들 있어요.암,먹고 말고요.이런 식으로 한다고 달라집니까.” “밤중에한번 나가봐요.대로에서 오줌싸는 놈이 부지기수고 그 중에는 모가지에 제법 새끼맨 놈들도 많아요.난 우리나■에 민주주의가 안맞는다고 생각해요.싸그리 조져야 세상이 좀 달라지지….” 사람들은 이미 .성역없는 비리척결'이니 .인사제도보완'이니 하는 말은 들은 척도 않는다.한두번 들은 말도,한두번 속은 말도 아니다.이대로 가다가는 이 나라가 거대한 위선(僞善)구조가 될게뻔하다.겉다르고 속다르고,입으로는 개혁하고 내막적으로 받아챙기고, 공식 방침 다르고 내부신호 따로 노는 이중구조로 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이런 상황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정권중추에서 부패사건이 연발하고,법이 법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형평과 공정을 상실하고,기강문란의 모범이 지도층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현상이 국민의 잘못인가,정부의 잘못인가 .
일반 사가(私家)에서도 가족중의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이웃에정중히 사과하고 집안단속을 엄히 하게 마련이다.그러나 우리 정부는 요즘 과오와 부패가 정신없이 터지는데도 긴장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이 없다.당정과 비서실에 불호령이 내리고 긴급국무회의.
긴급당무회의가 줄줄이 열리면서 기합을 넣고 통탄하고,대책을 강구하고 .국민에 드리는 말씀'운운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도 있을 법 하건만 그런 것도 없다.고작 나오는 소리라곤 어허,그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는 정도다.
게다가 터진 사건의 뒤처리를 보면 부인 유죄(有罪) 남편 무죄요,의원무죄 장관유죄라는 식이다.사람들이 다 웃고 있는 이런결말을 내려놓고도 태연자약한 그 무신경 무감각이 놀라울 뿐이다.안보허점이 이양호(李養鎬)사건으로 가려지고,이 양호사건이 공노명(孔魯明)사퇴로 가려지고,공노명사건이 이성호(李聖浩)사건으로 가려지고, 다시 세월이 가면 이성호사건도 넘어간다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한 정부에서 한달 사이 두 장관이 부패로 물러나는 이런 상황을 맞고서도 침통한 고회(苦悔)한마디없이,어금니를 악무는 다짐 한번 없이 넘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밤잠을 못 이루는 고민과 새로운 각오가 있어야 한다.그리하여 .괴상한 시대'를 .납득할 시대'로 바꾸는 노력이 없고서는 미래가 없다.
상황은 심각하다.사람들의 입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그냥 있어서는 안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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