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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조 투자 예정 단지 정치 논리에 '삐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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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는 지난 4일 6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경쟁력 평가'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순위 35위에 머물렀다. 초고속 통신망(1위), 특허 생산(3위), 근로 시간(7위) 등 기업 효율성과 인프라 부문에선 상위권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운용 성과 부문은 지난해 40위에서 올해는 49위로 더 내려앉았다. 특히 '정책일관성' 평가에선 최하위권(54위)에 머물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분석에 따르면 참여정부 들어 빚어진 '정책 혼선 사례'는 ▶법인세 인하▶선물 거래소 이관▶주공.토공 통합▶부동산 보유과세 강화▶신용카드 대책 등 굵직굵직한 것만 10여건에 이른다. 이처럼 '헷갈리는 정책'에 대한 기업들의 불안은 투자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기업 설비투자는 3년째 마이너스 행진을 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책 방향이 확실히 서지 않으면 기업은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납작 엎드리는 것이 기업의 생리"라고 말했다. 그는 "탄핵 정국이 끝나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하면 무엇보다 '정책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주었으면 한다"면서 "이는 모든 기업인의 바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안개 속' 대우종기 매각=대우종기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뒤 현재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이를 주관하는 자산관리공사는 1조원 넘게 들인 공적 자금 등 출자전환금을 회수하기 위해 가급적 비싼 값에 팔겠다는 방침이다. 매각 입찰에는 지금까지 팬택.두산.효성.한화.로템 등 국내외 26개사가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노조가 '우리사주조합에도 인수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고, 총선 직후 민노당도 이를 거들었다. 자산관리공사는 이를 사실상 받아들였다. 입찰 마감도 11일에서 18일로 연기했다. 기존의 인수 희망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일부 기업은 노조와의 제휴도 모색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관련업체 관계자는 "정치권 입김에 매각 작업이 휘둘리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어정쩡한 공정거래법 개정=정부는 지난해 공정위.재경부.전경련 등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출자총액제 개편방안 논의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각종 예외조항을 줄여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주장과 '아예 규제를 없애자'는 주장 등이 팽팽히 맞섰다. 당정 협의에선 1~2년 연기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공정위는 최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전격적으로 입법예고했다. 그러자 기업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홍재형 열린우리당 정책위원장은 "입법예고안을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투자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는 주장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본부장은 "정부가 출자총액제한 규제를 유지하면서 10대 성장산업은 예외로 한다는 등 기업을 계속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시기 놓친 수도권 공장 증설=삼성전자는 2002년 말부터 경기도 화성의 반도체 공장 증설을 추진했다. 기존 공장에 17만평을 더 확보해 세계적인 메모리 집적 단지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2010년까지 600억달러(약 70조원)를 투자, 1만8000여명을 고용하고 연간 750억달러의 수출을 한다는 청사진도 만들었다.

그러나 '파급 효과'를 들어 허용하자는 산자부 주장과 '수도권 집중 심화'를 내세워 반대하는 건교부 입장이 엇갈려 1년여 결론을 내지 못해왔다. 최근 정부는 국가균형발전 계획을 만든 후 투자를 허용한다는 절충안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직 토지 매입과 각종 인허가 절차가 남아 있어 공장 착공은 하반기나 돼야 가능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책 혼선으로 투자 계획을 확정하지 못하는 피해는 따질 수 없을 정도"라며 "투자 타이밍이 생명인 반도체 산업에서 이는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끝없는 성장.분배 논란=성장과 분배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경제기조에 관한 논란이 1년여 이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끝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여당이 다르고, 정부 내에서도 사람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다. 대한상의 이경상 기업정책팀장은 "현재 당정 간 구조를 보면 이헌재 경제팀의 실용(경제논리)과 열린우리당의 개혁(정치논리)이 상충돼 혼선을 빚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기업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막막해 한다. 한 대형 제조업체 사장은 "성장을 우선한다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공격적인 투자를 해야 할 것이고, 개혁을 우선한다면 가급적 보수적인 경영을 하면서 체질 개선에 더 신경써야 할 것"이라며 "문제는 어느 코드가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공이 너무 많아 누가 경제정책을 결정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요즘처럼 헷갈린 적이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 '이제 논쟁은 그만두자'는 목소리가 많다. "세계 각국이 저마다 경쟁력 강화, 경제 살리기에 매달리고 있는데 우리만 유독 이념 논쟁에 매달리는 것이 안타깝다."(황인태 서울디지털대학교 부총장) "경제를 살리는 문제에서 진보와 보수의 논쟁은 전혀 의미가 없다."(이수영 경총 회장)

◇특별취재팀=김시래.이원호.이현상.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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