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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책 읽어주는 어머니를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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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 금요일 아침마다 책 읽어주시는 어머니가 오신다. 매주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들어오셔서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20분여 동안 아이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주시며 동화책을 읽어주신다.

처음 어머님이 교실을 들어오실 때만 해도 아이들은 매우 어수선했다. 인사를 나누기도 쉽지 않을 만큼 어수선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언제고 한결같으셨다. 짧은 책소개와 인사를 시작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지신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 맛깔스럽게 책을 읽어주신다.

어느새 아이들 뿐 아니라 교사인 나까지도 어머니의 동화책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두 눈이 어머니가 들고 계신 그림동화책에 완전히 고정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행여나 질문을 하려다가도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참는 눈치였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녀석들도 입을 열었다가 친구들의 반응이 없자 이내 머쓱한지 기가 죽은 눈치였다. 그만큼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금요일 오전이면 어머님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에 푹 빠져 보낸다. 수업 시간으로 인해 동화책 한 권을 다 들려줄 수 없을 때에는 다음 주에 이어서 읽어주신다. 뒷이야기가 궁금한지 교실 문을 열고 나가시는 어머니 등 뒤로 아이들의 질문들과 '조금만 더'라는 애처로운 바람이 쏟아진다. 덕분에 제대로 끝인사도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순간부턴가 금요일 책 읽어주시는 시간이 되면 화단 청소를 하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삼삼오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아이들도 교사가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들고 어머니가 들어오시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그날만큼은 지각하는 학생 수도 줄었다.

이 때 교사인 내가 주목한 것은 아이들의 '기억력'과 '상상력'이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동화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전 주의 줄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뒷이야기에 대해서도 이미 다양하게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내게 와서는 혹시라도 선생님은 뒷이야기를 알고 계신지 조용히 묻고 가기도 한다.
독서감상화 그리기 활동을 할 때 일이다. 몇몇 아이들이 금요일에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뒤에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서 그림으로 그렸다. 이럴 경우 원작 글의 뒷이야기와 전혀 다른 내용을 그리기도 하지만 평소에 많이 알고 있는 책들의 뻔 한 장면을 그린 아이들과 다르게 책의 느낌이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고 그림 자체가 기발하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설명도 논리적이고 자기만의 색도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사고 작용을 촉진하고 아이들의 기발한 상상력을 끌어내는 데 촉진제가 되어주는 것 같다.

또 다른 하나 주목한 것은 '집중력'이다.

책 읽어주시는 어머니가 가시고 난 후 시작되는 금요일 아침 1교시의 시작은 보통 때와 다르다. 별다른 동기 유발 없이도 아이들 모두 매우 침착하고 바른 자세로 수업을 준비하고 발표에 참여한다. 책 많이 읽는 아이치고 산만한 아이는 없다고 하던데 금요일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독서'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많은 학부모들과 많은 학생들이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책읽기를 즐겨하고 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책읽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책읽어주시는 어머니와 열심히 듣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가장 매력 있는 독서 방법 중 하나가 매일 조금씩 아이들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어머니가 직접 골라 읽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 읽어주는 양은 많지 않지만 어머니가 직접 들려주는 일부분의 이야기는 뒷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줄 것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에 가자. 그리고 아이가 읽고 싶어 하는 책 말고 아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책 한 권을 더 사자. 대신 부모도 아이도 이전에는 전혀 읽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야기책을 고르자. 부모도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까지는 미리 읽지도 말고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두자. 매일 밤 아이가 잠들기 전에 선물을 꺼내듯 책을 꺼내 읽어주자. 하루에 너무 많은 내용을 읽어 줄 필요는 없다. 엄마와 아빠가 아닌 책을 읽어주는 요정처럼 5~10분 정도 분량만 나누어 읽어주고 뒷이야기를 남겨두자. 이렇게 책을 읽어준다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 내 아이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가슴 속에 담아 두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부모도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읽는 재미가 솔솔 할 것이다. 가끔 아이와 함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흉내내보고 역할극도 해보는 것도 좋다.

우리 반에 책 읽어주시는 어머님께서는 영어도 원어민처럼 구사하실 수 있으셔서 매주 수요일 방과 후엔 학교 도서실에서 아이들에게 영어 동화책도 읽어주신다. 많은 아이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그림책에 나온 이야기로 접하는 영어를 좀 더 쉽게 이해하는 것 같다.

아이에게 동화책이나 영어동화책 읽기를 강요하기 전에 아이의 침대 옆에서, 혹은 아이의 옆자리에서 책을 읽어주자.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가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책을 대충 대충 빨리 읽기만 하는 아이가 정독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책 읽어주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김범준 칼럼니스트

※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