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금융위기는 곧 정치위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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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늘의 금융위기는 무절제한 시장의 팽창으로 말미암은 경제위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위기를 극복할 정책, 전략 및 수단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선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면한 위기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하는 정치적 위기임을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실감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조석으로 들려오는 답답한 경제뉴스에 시달린 나머지 우리 정치의 건강진단을 소홀히 한다면 경제위기는 결국 심각한 정치위기로 악화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

금융위기의 세계화로 지구촌 곳곳에서 정치경제학적 거대담론이 전개되고 있다. 냉전의 종결로 가속도가 붙은 시장의 세계화가 세계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자유와 개방을 필요로 하는 시장과, 공공이익 및 경제의 안정을 위한 통제의 책임을 진 국가 사이의 적절한 균형관계가 유지돼 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오늘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바로 그러한 논란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시장과 국가 간의 균형관계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의 경우, 특히 현 사태에 대응하는 이명박 정부에는 각별히 예리한 정치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와 취임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통치철학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반(反)시장적이라고 규정하고 차별화를 시도한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고도성장을 위한 활력소로 시장의 자율을 확대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친(親)시장 또는 친기업적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보니 아무리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라 해도 시장의 자율 신장과 규제완화에 계속적으로 우리 경제정책의 초점을 맞추기는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그런다고 시장의 자유와 절제를, 특히 정부의 규제완화와 강력한 통제를 동시에 강조하는 일견 모순된 입장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는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절대적 필요조건은 무엇보다도 높은 수준의 국민적 합의와 지지다. 일상적으로 경제의 불황이나 파탄이 수반하는 고통은 평준화되기보다는 빈곤층에 가중되는 것이 통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를 함께 지켜나가야 하는 지도자의 입장은 국민에게 필요한 최저 복지수준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대한 확고한 우선순위를 견지하며 국민과의 공감대를 넓혀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일련의 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시장 만능주의자라는 오해나 음해의 소지를 없애도록 초당적 대화와 유연한 정치적 입지를 넓혀갈 때에 비로소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모두를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가 마련될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 들렀던 척 헤이글 미국 상원의원은 대통령선거의 막바지에서 첨예하게 대결하고 있는 오바마 후보와 매케인 후보에게 상원의 동료로서 ‘미국은 지금 역사적 전환점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음 대통령은 초당적이고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필요로 할 것이니 이번 선거기간에 상대 후보나 지지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그리하여 국민적 단결을 어렵게 만드는 발언은 절대 삼가기 바란다’는 소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두 후보는 전적으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를 들으며 역시 미국은 경제위기를 정치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저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10년 전 외환위기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에는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상당 기간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또 한 번의 경제위기에 직면한 우리 국민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모두가 시련을 극복하려 힘을 합칠 수 있는 정치의 쇄신과 개혁, 즉 국민의 적극적 참여와 합의를 가능케 하는 정치의 새 판과 틀을 짜는 것이다. 여야를 초월한 180명의 의원이 헌법연구모임에 참여하고 국회의장이 앞장서는 이번 18대 국회에서 왜 정치개혁의 바람은 불지 못하는가. 지도자와 국민이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대책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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