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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늙어가면 안 될까

중앙선데이

입력

왕년에 인기 있던 가수들이 40줄만 넘어가면 트로트 가수로 변신하던 때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 포크 가수였건 록 가수였건 댄스 가수였건 상관없이 오랜만에 나타난 무대에서는 죄다 뽕짝풍의 노래를 부르는 게 1990년대까지 가요계의 정석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마흔이 될까 말까 한 왕년의 여주인공들을 느닷없이 20대 여주인공의 엄마로 등장시키곤 한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노래나 미모를 기억하는 팬들을 왠지 김빠지게 하는 이런 트렌드는 “나이 들면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 중년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새 트렌드는 오락 프로에서 주책맞게 웃기기인 듯하다. 아마도 일찌감치 조형기·김흥국 등이 이 길을 개척한 뒤 MBC-TV ‘브레인 서바이버’의 ‘낙엽줄’에서 나이 든 웃기는 연예인들이 대폭 발굴됐다.

지금은 적극적인 몸짓으로 스스로 망가지고 웃기고 거침없이 말하거나 푼수 짓을 하는 중장년층만 모아놓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세 바퀴’ 같은 쇼까지 등장할 정도다. 여기선 앞서 ‘낙엽줄’에서 명성을 날리던 전원주·선우용녀를 비롯해 이른바 ‘예능 늦둥이’라는 양희은·이승신 등이 이경실 등과 함께 입담을 자랑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KBS-2TV ‘해피 투게더’에도 이제 종종 중년의 게스트들을 볼 수 있다. 이건 10대나 20대, 혹은 스타나 주연급이 아니면 넘보기 힘들었던 인기 상한가의 버라이어티 쇼에 나이 든 사람들의 입지를 넓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다. 또 여자들이 조신하고 다소곳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할 말은 하고 적극적으로 웃겨주고 성이나 부부생활 등을 소재로 걸쭉한 입담을 펼치는 털털함을 보여주는 측면도 새롭다.

하지만 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팔팔한 젊은 세대에 맞서는 중년들의 무기가 젊은 사람들 눈에 주책이나 푼수떨기로만 인식된다면 같이 늙어가는 입장에서 보기엔 좀 편치 않은 구석도 있다. 가뜩이나 어른이 어른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시절이라 드는 괜한 피해 의식인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친근함과 채신 없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스꽝스러워져야만 그래도 좀 알아봐주는 이 한없이 가벼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보여주는 그 몸짓들이 서글퍼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는 남의 눈 때문에 보여주지 못했던 소탈함을 뒤늦게 기꺼이 펼쳐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그저 주책맞고 남의 눈치 안 보는 아줌마·아저씨에 대한 우스운 편견에 자신을 끼워 맞춰 가고 있는 걸까.

얼마 전에는 여자 30~40대 연예인들 사이에 ‘동안’ 바람이 불었던 적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동안’ 열풍이나, ‘망가지는 중년’ 트렌드나 모두 중년을 그저 중년답게 늙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풍조 같다. 중년에 살아남으려면 황신혜처럼 스무 살의 미모를 간직하거나, 최진실처럼 확 망가지며 열연을 하거나, 이승신처럼 숨겨놨던 ‘4차원’ 끼를 발휘해야 하는 걸까. 아하, 그러고 보니 미모와 푼수기를 겸비한 ‘엄마가 뿔났다’의 장미희가 올해 최고 상한가를 친 건 아마도 모든 걸 다 갖췄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확실한 것 하나는 이놈의 연예‘판’은 살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는 걸로는 존재를 인정받기 어려운 곳이라는 점이다. 제 맘대로 늙어갈 수도 없다니 참 이상한 나라, 괴기한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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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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