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잇단 투자보류 '긴축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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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기업들이 자금 조달.운용에 비상이다.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 그렇지 않아도 몸조심하던 국내 기업들은 차이나 쇼크, 유가 상승, 원자재난에 이어 주가 하락, 환율 급등 등 금융시장 불안까지 예기치 못한 악재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생존 우선'의 보수경영 체제로 확 돌아섰다.

특히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 채권의 가산금리가 가파르게 치솟아 해외에서 돈을 끌어모으는 데도 부담이 커지는 등 경영을 둘러싼 환경이 어느 것 하나 밝은 게 없다는 게 기업들의 고민이다. 이에 따라 각종 투자를 보류하면서 긴축 경영의 틀을 짜는 데 매달리고 있다.

SK㈜는 올 경영계획을 짤 때부터 투자를 최소화하고 차입금을 갚는 데 주력키로 했지만 당초 예측했던 경기 전망치가 속절 없이 빗나가자 비용 절감계획을 다시 다듬고 있다. 또 각 사업장에 생산성을 더 올리는 방안을 짜도록 지시했다.

이 회사 금융팀 관계자는 "경제상황이 점점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이라며 "행여 금리마저 치솟을 것에 대비해 올해 빚 상환 규모를 당초 계획(8000억원)보다 늘리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경기 침체가 길어질 상황까지 포함해 다각적인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있다. 자금 여력이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지만 투자는 상황을 지켜보며 속도를 조절키로 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1년 전부터 최악의 경기상황에 대비해 다양한 시뮬레이션(가상실험)을 해왔으나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한솔제지는 올해 국내외 제지회사 인수를 검토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를 전면 보류하고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주가 폭락은 당장 여러 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 상장을 통해 설비증설 투자금을 마련키로 했던 LG필립스LCD는 증시가 맥을 못 추자 자금 조달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

LG는 오는 7월께 한국과 미국 증시에 LG필립스LCD 주식을 동시에 상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연기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 중이다.

현대상선의 자사주(지분 12%)를 매각하기 위해 한 외국투자가와 협상 중인 현대그룹도 주가 하락이 매각작업에 영향을 미칠까 긴장하고 있다.

현대차는 제휴선이었던 다임러가 결별하면서 지분을 다른 곳으로 넘길 경우 이 지분을 사는 투자자가 주식값이 싸진 틈을 이용해 경영권을 넘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다음달 중순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한 텔슨전자 관계자는 "주당 1500원으로 예정했던 발행가를 1090원으로 내려 발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목표 공모액에서 90억원의 차질을 빚게 됐다는 것. 정보기술(IT) 수출기업인 P사는 다음달 중에 하려던 유상증자 계획을 당분간 연기하기로 했다.

고윤희.이원호.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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