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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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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젠 경제위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조차 겁난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금융위기 이후에 진짜 위기가 온다고 하자 당장 실물경제의 침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겁주자고 한 말이 아니라 위기에 대비하자는 경고였으나 막상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나자 정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가 더 길어지면 어쩌나. 세계경제의 동반 침체가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나 않을까. 오만 가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돌고 두려움이 시커먼 심연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지금은 위기 자체보다 위기에 대한 공포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형국이다. 내 안의 두려움이 스스로 두려움을 낳고, 서로의 두려움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두려움을 키운다. 말 그대로 공포의 전염이다. 전염성 공포가 시장을 휩쓸면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대응은 설 땅이 없어진다. 이 금융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판에 누군들 불안하지 않겠는가. 여기다 실물경제의 침체가 앞으로 몇 년은 더 간다니 그저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다급해진 정부는 1300억 달러를 동원한 금융시장 안정대책에 이어 10조원을 퍼붓는 실물경제 안정대책을 내놨다. 그런다고 위기가 당장 사라지기야 할까마는 위기에 대한 빠른 판단과 과감한 대응책만큼은 사줄 만하다. 불안과 공포가 시장을 지배할 때는 신속하고 과단성 있는 조치로 시장을 압도해야 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고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위기에 직면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 판에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면 혹시 위안이 될까. 미국 월가의 전설이 된 워런 버핏은 “새가 울 때를 기다리다간 봄을 맞지 못할 것”이라며 “온갖 나쁜 뉴스만 난무하고 모든 사람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이 장기 투자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투자의 적기”라고 했다. 다른 투자자들이 탐욕을 부릴 때는 두려워하고, 그들이 두려워할 때 욕심을 부리라는 것이 그의 투자 신조다. 버핏은 실제로 금융위기가 고조되던 즈음 자신의 투자회사를 동원해 골드먼삭스와 GE에 거액을 투자했고, 최근에는 개인 돈으로도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시장에선 그가 월가의 구원투수로 나섰다고 했지만 그가 자선사업 하듯 투자에 나섰을 리는 없다.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모한 투자는 ‘최대한 많이 벌어 많이 기부한다’는 그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 그는 지금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보고 투자한 것이다. 그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이번 금융위기로 미국경제가 망하지 않을 것이며, 둘째 위기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장기적으로 더 큰 수익을 낼 것이라는 확신이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이 대통령은 20일 열린 국민경제 자문회의에서 “과거 위기 때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은 위기가 지나면 위축되고, 위기에 적극적·공세적 입장으로 철저히 대응하는 기업과 사람은 성공했다”면서 “정상적이라면 선진국을 따라가기 힘들지 모르지만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고 했다. 위기의 한복판에 선 대통령의 발언치고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버핏과 같은 근거에서 나온 말이라고 본다. 첫째, 한국경제는 이번 위기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둘째,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하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관건이 ‘장기적 안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길고 멀리 내다볼 때 눈앞의 위기가 미래의 기회임을 알 수 있다. 케인스는 미국의 대공황 직후 ‘(그냥 내버려 두면)장기적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란 근거 없는 낙관론에 대해 “장기적으론 우리 모두 죽는다”고 반박했다. 단기적으로 위기에 대응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을 갖자는 것은 단기적인 대응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단기적으로도 위기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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