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미술선생님이 남긴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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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가을은 맛깔스러운 수필 한편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하늘은더할 수 없이 푸른 빛깔로 아름답게 물들어가고,작은 아기손 같은 은행잎들이 거리를 노랗게 물들인다.
지난 16년동안 학생 신분으로 맞았던 가을과 사회인이 된 지금 맞는 가을은 사뭇 다른 감상이다.이런저런 책과 노트,그리고무거운 사전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워크맨이 가지런히 들어 있던 나의 가방 속이 이젠 간단한 메이크업 도구. 명함꽂이.신용카드와 예전보다 조금은 두둑해진(?)지갑으로 바뀌었다.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그리고 허전한 것은 지난 16년동안 항상곁에서 나를 바라봐주시고 인도해주시던 선생님들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마치 바람막이가 없어진 것같은 느낌이다.
유난히 병약했던 고등학생시절 나를 지켜봐주시던 선생님 한분이이런 가을날이 되면 항상 떠오른다.누구나 여고시절이 그러하듯 나는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였다.문학소녀를 꿈꾸며 늦은 시간까지책이나 소설속 주인공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미술을 가르치셨던 담임인 H선생님께서는 아침 자율학습시간이 되면 졸린 눈의 우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셨다.언제나 자상한 눈빛으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해주셨다.
그래서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비가 오는 가을날 나는 드디어 선생님께 「너무나 분위기가 좋은 이런 가을날 선생님과 함께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쪽지편지를 건넸다.물론 큰 기대는 없이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편지를 전했던 그날처럼 비오는 날 선생님은 사환언니를 시켜 나를 교무실로 오게 해 도자기잔에 커피를 가득 부어주셨다.그때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지금껏 가장 아름다운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나는 더이상 학생이 아니며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가고있다.이 가을,은행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향긋한 커피세트를 골라 모교에 계신 선생님을 꼭 찾아가리라 마음먹어 본다.
김혜연<경기도성남시 경원전문대 부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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