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 달에 한 번꼴로 ‘묻지마 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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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본 오사카(大阪)시 나니와(難波)구의 한 DVD방에서 이달 초 46세 무직 남성이 한밤중에 불을 질러 15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전 기업에서 정리해고된 이 남성은 “사는 게 싫다. 빨리 죽고 싶다”며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직장을 잃은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사채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DVD방에서 잠을 자다 희생된 사람들은 전철 막차를 놓친 30·40대 샐러리맨, 사업에 실패하고 새 출발을 준비하던 50대 남성, 날품팔이 노동자 등 범인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묻지마 살인 사건’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길거리에서, 아무 때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일본에선 ‘도리마(通り魔·길거리의 악마)’라고 불린다.

올 들어 일본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은 모두 11건. 과거 10년간 연간 평균 6.7번꼴로 발생한 데 비하면 2배 가까이로 늘었다. 6월 초에는 도쿄 한복판인 아키하바라(秋葉原)거리에서 길 가던 시민 7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7월에는 도쿄 하치오지(八王子)시의 한 서점에서 한 남성이 매장 직원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등 묻지마 살인 사건은 잊혀질 만하면 벌어지고 있다. 이러니 시민들은 갈수록 불안해하고 있다.

일반 살인 사건도 올 들어 늘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발생한 살인 사건은 64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 많아졌다. 4년 연속 감소하던 살인 사건이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범행 동기다. 대부분의 범인들은 모두 경찰 조사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고 진술했다.

일본 사회는 공부만 강요한 부모에 대한 불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애인도 없는 외로움, 하류 인생이라는 패배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저소득층의 불안 등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대부분의 묻지마 사건 범인들이 범행 전 심한 고독감에 시달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인터넷 사회가 되면서 대인 관계가 상당히 사라진 데다 도시화·핵가족화 등으로 고독감을 느끼는 개인들이 늘고 있는 반면 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가족과 사회의 포용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사회구조도 묻지마 살인 사건 증가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쿄(東京)신문은 “양극화 문제는 일본 사회의 새 고민으로 떠올랐다”며 “젊은이들이 빈부 차이를 심하게 느끼면서 불만이 쌓여 탈출구로 전쟁 등 극단적인 것을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를 보면, 일본의 빈곤율은 13.5%로 회원국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20대 세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이 비율은 매년 급증하고 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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