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을찾아서>7.숭산 會善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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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며 한때 비구니이기도 했던 측천무후(624~705년)가 숭산혜안선사를 궁내로 초치했다.혜안(일명노안.대안.도안,582~709년)은 입내하자마자 목욕탕으로 안내됐다. 혜안의 목욕은 단순한 목욕이 아니라 부구식(浮구識,생사란 물거품처럼 덧없음)을 시험당하는 다소 짓궂은 것이었다.측천무후는 혜안선사로 하여금 아름다운 궁녀들이 알몸으로 탕 주위에 빙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고 목욕을 하게 했 다.
혜안은 태연하게 물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성적 충동을 느끼는기색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이.
광경을 엿보던 무후는 급기야 『물에 들어가 있는 위대한 사람을 본다(入水見長人)』며 거듭 감탄했다.
혜안(慧安)이 법력을 테스트받게된 사연은 이렇다.무후의 초청으로 1차 입내했을 때 나이를 묻자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무후는 『어찌하여 자신의 나이도 모르는가』고 되물었다.
『생사의 몸은 순환하는 것,둥근 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는 법이라.물거품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망상(浮구識)일 뿐인데 무슨 생년월일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소.』 혜안의 대답이었다.
무후는 혜안의 이 「부구식 경지」를 직접 시험하고자 미녀들 앞에서 벌거벗게 한 것이다.그러나 혜안은 「초월의 한계」를 이미 극복한지 오래였고 유.무의 분별을 뛰어넘어 지평선 저 너머에서 노닐었다.
이 일화는 후대 선사들이 자주 거론한 화두이기도 하다.선종 5가7종중 최초의 종파인 위앙종을 개창한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선문답에도 이 이야기가 등장한다.위산은 혜안이 무후에게 섹스(性)와 망념을 시험당한 그때의 상황에 대해 『아 마 이런 경우라면 철불(鐵佛)도 땀을 흘렸으리라』고 평했다.
5조 홍인의 법제자인 혜안선사는 말년을 회선사에 주석,신수와함께 소림사를 중심한 동산법문의 제도(帝都,장안.낙양) 포교에크게 공헌한 초기 북종선의 거목이다.그는 수양제 대업연간 탁발을 해다가 운하 공사에 동원된 노역자들의 배고 픔을 덜어주기도했다.양제가 이를 알고 입경(入京)을 청했으나 끝내 불응하고 태화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당나라때는 측천무후.중종.예종등 3제의 국사로 존경받았고 1백20세 넘어까지 장수했다.혜안은 『내가 죽거든 시체를 숲속에놓아두었다가 들불에 타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겨 들불에 탔고 80과의 사리가 수습됐다.제자들이 사리를 모아 회선사 경내에 그의 묘탑을 건립했으나 훼멸돼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중국 불교의 승려 장법(葬法)은 동한 명제때(68년) 불교가처음 전래된 이래 인도 불교식 다비장법이 계속돼왔다.그러나 중국 선불교 4대 조사 도신(580~651년)에 이르러 시신을 그대로 매장하는 민간장법을 수용하는 세속화 조치 가 단행됐다.
도신조사는 천화후 자신의 시신을 그대로 탑 속에 매장하도록 유언,그 시범을 보였다.
혜안선사가 선종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사적 비중의 하나는 남종선과 북종선 교류의 「연결고리」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청원행사(?~740년)와 함께 6조 혜능의 2대 법제자이며,임제종.
위앙종의 법맥 원류인 남악회양선사(677~744년 )가 6조친견에 앞서 그에게 최초로 참문(參問)했다.또 그의 제자 정장선사가 6조한테 인가를 받음으로써 남.북종간의 법맥 교류가 이뤄졌다. 세월에 무심한 선가의 이야기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조동종 개산조인 동산양개(807~869년)가 행각중 산속에 은둔해사는 마조의 제자 용산(龍山)화상을 만났다.동산이 『이 산에 머무른지 얼마나 되시는지요』하고 물었다.그는 『세월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대답,시간을 초월해 사는 담담한 도인의 모습을보여주었다.문답은 더 이어졌다.
『화상께선 어떤 도리를 보았기에 그렇습니까.』 용산이 답했다. 『나는 진흙소 두마리가 바다로 들어가는걸 보았는데,지금껏 소식이 없다(진흙소는 물속에 들어가면 녹아 없어져 종적도 그림자도 없다.세상과 일체가 돼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해탈인의삶을 뜻함).』 혜안선사의 원적(圓寂)도량인 회선사 답사는 정말 「행운」이었다.결과부터 말한다면 군 포병대 안에 있는 유적을 답사,촬영한 것이다.이같은 군부대내 「비개방사찰」 촬영은 외국인으로선 뜻밖의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소림사 서북쪽 천중산(天中山,현재명 태보산)적취봉 아래에 위치한 이 절은 측천무후가 친히 찾기도 했던 고찰이다.우주의 중심을 뜻하는 천중산이란 이름도 무후가 명명한 것이다.원래 이 절은 북위 효문제의 별궁이었는데 수나라때 회선사로 이 름이 바뀌었다. 절 입구를 들어가는데 길옆으로 군부대 막사가 보였다.절까지는 별다른 검문없이 들어갔다.원대 양식인 대웅전은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인데 문이 닫혀있다.알고보니 아직 승려가 입주하지않았고 정부 문물관리소가 관리중인 비개방사찰이다.
관리소 직원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신도 한명이 지키고 있다.근래 조성한 백옥 석가모니불을 모셔놓고 불전(佛錢)은받는다. 절 주변에는 당나라때의 유명한 승려 과학자 일행(一行)의 행장비.선종법맥도등을 비롯한 옛 비석들이 문혁때 파괴된 채로 널려있다.
관리인에게 혜안선사의 묘탑 안내를 부탁하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르쳐주곤 사무실로 들어가버린다.우리끼리 무작정 올라갔다.보초병에게 저 탑을 좀 구경하겠다고 하니까고개를 끄덕여 승낙한다.
탑쪽으로 가는 부대앞 마당에는 대포가 나란히 정렬돼있다.
탑은 마당끝에 있는데 얼른 봐도 고탑이다.88년 전국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정장(淨藏)선사(675~746년)묘탑이다.정장은 19세에 출가,혜안선사를 10년간 시봉하다 스승이 입멸하자조계로 내려가 6조 혜능의 법을 이은후 회선사로 돌아와 행화를폈던 선지식이다.
안내문을 보니 746년 건탑이고 중국 최고(最古)의 8면 정각식 전탑이다(3층.10.345).1층 탑면에 붙어있는 탑명(塔銘)은 많이 흐려져있어 올라가 먼지를 털고 간신히 판독했다.
탑 상층부의 돌에 조각된 연화좌와 불꽃모양.보주( 寶珠)모양의탑찰(塔刹)은 아주 정교하고 화려했다.
***중 국의 가장 오래된 국보 전탑을 답사,촬영한 소득은 정말 큰 보람이었다.혜안탑은 부대사무실뒤 언덕에 그 유지만 남아있다. 차를 돌려 나오다가는 군막사 한가운데 있는 청대 선사들의 묘탑을 답사했다.마침 초병도 없어 그냥 불쑥 들이닥쳤다.
막사 옆동에는 닭.염소.돼지등도 기른다.저녁식사 시간이라 조용하다.탑을 거의 다 돌아볼 즈음 「나가라」는 연락이 왔다 .
이만하면 됐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메모 ▶위치:하남성 등봉시 십리포▶교통:등봉시 서북 6㎞.포장도로▶유적:명대 범종.당대 명필 안진경의 편액 「天中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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