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의 중국 산책] 한국을 떠나며...닝푸쿠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상철의 중국산책 블로그 가기

2005년 9월 11일 한국에 부임한
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가 20일 1130여 일의 임기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16일 저녁 닝 대사는 서울 롯데 호텔에서
한국의 지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공식 이임 리셉션을 가졌습니다.

이날 눈에 띈 것은 닝 대사가
한국의 지인들을 위해 준비한 조촐한 선물이었습니다.

한 손 안에 쏙 들어올 조그마한 크기로
병풍 같은 느낌을 주는 접이식의 소책자엔
'한국을 떠나며...'라는 제목으로
이한(離韓)의 심정을 담담하게 적은 싯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닝 대사가 평소에 즐겨 시를 지었다는 말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싯귀를 남긴 것은 한국을 떠나는 감정, 특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찬히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한 중국 외교관의 한국 근무에 대한 감회가 절절이 배어나옴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아직 떠나가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추억이 시작되네'와 같은 글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래에 그의 시를 전재합니다.
원래는 중국어로 쓴 것을 한국 지인이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요.
편의상 한국어 시만을 소개합니다.

'한국을 떠나며...' 닝푸쿠이

삼년전
단풍잎이 저 하늘가를 처음 물들였을 때
중국 인민의 깊은 정과 두터운 우정을 가슴에 가득 담고서
나는 이 땅에 첫발을 내딛었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네
청와대에서 국서를 건넬 때의 그 장엄했던 순간을
그 때 그 시각부터
나는 이 땅과 굳건하게 함께 했었네

이 땅은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아
나는 직접 나의 두 눈으로 이 땅의 아름다움을 읽었었네
서울의 화려함과 경주의 경건함
설악산의 수려한 봉우리와 제주도의 펄럭이는 바람

이 땅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과 같아
나는 직접 나의 영혼으로
이 땅의 웅장함을 귀 기울여 들었었네
유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
부지런한 국민과 꺼질 줄 모르는 투지

이 땅은
나의 조국과 지척 거리의 이웃
이 땅의 사람들은
나의 동포와 형제처럼 가깝네

잊지 못할
북경 올림픽 때 여러분들의 환호성
잊지 못할
사천 대지진 때 여러분들의 흐느낌

우리도
붉은 악마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응원한 적이 있었고
우리도
남대문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남몰래 깊은 탄식을 했었네

중국과 한국은 단지 한줄기 바닷물 사이에 있는 가까운 거리
우리와 여러분들의 마음은 언제나 함께 해왔었네

시간은 쏜살처럼
눈 깜박할 사이에 일천여일이 이미 지나갔지만
이 땅에 대한 나의 애정도 바로 이 일천여일 동안
한 방울 한 방울씩 마음속으로 흘러 모였네

만약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나는 정말 이 땅의 방방곡곡을 다 거닐면서
미약하나마 나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중국 인민들의 우정을 이 땅의 모든 곳에 전하고 싶네

아직 떠나가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추억이 시작되네
김치찌개에서 피어오르는 매콤한 향기
판소리에서 느껴지는 옛 가락의 운치

아직 떠나가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리움이 시작되네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거리에 수북이 쌓인 은행나무 열매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파는 할머니의 환한 미소

단풍잎이 또 다시 하늘가를 붉게 수놓으려고 시작할 때
헤어지기 섭섭한 마음을 가슴에 안은 채
나는 곧 귀국의 여정 길에 오르게 되네
삼년간의 아름다운 추억과
한국 사람들과 쌓은 깊고 두터운 우정은
이미 행낭 속에 넣어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놓았네

안녕 서울
안녕 한국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닝푸쿠이
2008년 10월 서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