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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하면 “법대로” … 고소·고발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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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 이모(30·여)씨는 5월 서울 서초경찰서에 고소장을 냈다. 상대는 A백화점의 대표이사였다. 이씨는 “4년 전 백화점 매장에서 구입한 명품 선글라스가 알고 보니 중고품이었다. 명백한 사기”라고 주장했다. 담당 수사관은 “고소보다 소비자보호원에서 상담받는 게 낫다”고 권했다. 그러나 이씨는 “법대로 처리하면 되지 왜 말이 많냐”며 언성을 높였다. 수사관은 백화점의 매장 점원, 선글라스 브랜드의 법무팀장 등을 불러 조사했다. ‘경찰을 못 믿겠다’는 이씨의 요구로 그의 진술을 촬영·녹화했다. 그러나 구매 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씨는 A백화점에서 구입한 적이 없었다. 두 달여의 수사 끝에 사건을 각하한 수사관은 “선글라스를 수리해 달라는 이씨의 요구를 백화점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고소한 것 같다”고 말했다.

#2. 진모(32·여)씨는 8월 송파경찰서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진정을 넣었다. 진씨에게서 애완견을 분양받은 김모(41)씨가 ‘수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진씨는 “무료로 개를 분양하는 대신 김씨가 나에게 개를 가끔씩 보여 주기로 약속했는데 연락을 끊었다. 개 주인들을 속이고 상습적으로 개를 팔아넘기는 자 같다”고 주장했다.

진정을 낸 진씨는 거의 매일 경찰서를 찾아왔다. “부당·편파 수사를 하고 있다”고 경찰을 몰아붙였다. 수사관은 김씨의 인터넷 아이디를 조회, 인적 사항을 파악했다. 확인 결과 김씨는 직장을 옮겨 출장을 간 상태라 연락이 닿을 수 없었다. 분양받은 개는 건강히 자라고 있었다. 경찰은 진씨의 진정을 ‘무혐의 처리’했다.

◆묻지마 고소=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단 고소장부터 내는 ‘묻지마 고소’로 경찰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접수된 고소·고발 사건은 모두 41만8700여 건이다. 인구 1만 명당 고소·고발이 86.8건에 달했다.

비슷한 사법 체계를 가진 일본(1만명당 1.3건)의 60배가 넘는 수치다. 반면 실제 사법 처리 대상이 되는 건은 접수된 10건 중 2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해 경찰에 접수된 고소·고발 중 ‘범죄가 성립된다’는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건은 전체 23%에 그쳤다.

경찰청 관계자는 “고소장을 접수하는 데 별도의 비용이 없는 데다 범죄 신고처럼 인터넷·전화 등으로 손쉽게 접수되기 때문에 줄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대 이동희(형사법) 교수는 “피해자들이 직접 고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일본과 마찬가지”라며 “하지만 일본에서는 범죄 증거가 상당 부분 인정돼야지 고소장을 접수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뚜렷한 증거 없이 고소·고발을 남용하는 경향이 짙다는 설명이다.

◆상대방 압박으로 악용=이모(50)씨는 2월 “강원도 땅을 사려고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기획부동산 업체가 땅을 이중 매도했다”며 부동산 업체 대표 최모(39)씨를 고소했다. 서초경찰서는 수 명의 참고인을 조사하고 이씨와 이들을 대질하는 데 8개월이나 걸렸다. 경찰의 확인 결과는 이씨의 주장과 정반대였다. 알고 보니 잔금을 제때 치르지 않아 계약을 파기당한 이씨가 “계약금 200만원을 돌려주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업체를 압박했다.

이처럼 고소·고발을 계약 상대방을 압박하는 ‘민사적 해결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도 줄지 않고 있다. 소지품을 잃은 뒤 분실 신고 대신 고소·고발·진정을 내는 이들도 있다. 이달 초 홍모(40·여)씨는 송파서에 “구청에 민원을 보러 갔다가 양산을 두고 왔는데 없어졌다”며 진정을 냈다. 상대는 양산을 들고 간 ‘신원불상자’, 혐의는 ‘점유이탈물 횡령’이었다. 홍씨가 수사를 촉구하며 매일 찾아오는 통에 수사관들이 구청 폐쇄회로(CC)TV를 확인했으나 아직 누가 들고 갔는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상황이 이렇자 경찰 일각에선 ‘반려제도’ 도입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청 관계자는 “증거 불충분 등 요건이 부족한 사건의 경우 경찰 재량으로 고소·고발장을 접수하지 않는 반려제도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희 교수는 “수사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개인 간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법률적 제도가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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