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北.美합의 2년 점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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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은 94년 10월21일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대가로 북한의 핵개발 동결 약속을 받아냈다.이른바 북.미 제네바 합의다.그로부터 2년.북.미관계의 어제와 내일을 살펴본다.

<편집자註> 북.미 제네바합의 이후 지난 2년간 미국은 북한 길들이기에 골몰했다.먹을 것을 거둬주고 땔감을 대주며 궁지에 몰려 독이 잔뜩 오른 뱀을 달래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양국간 접촉은 크게 늘어났다.북한 유엔대표부와 미국무부의 대화창구가 상설화되고 사용후 핵연료봉 처리의 감독을명분으로 미국관리들의 정례적인 방북이 이루어졌다.
학술회의 참석을 목적으로 한 북한 고위대표단의 방미도 빈번해졌다.미국의 의도였든 아니든 이제 북.미관계는 핵을 중심으로 한 위기관리의 수준에서 일상적 관계로,비정상적 관계에서 정상적관계로 질적 발전을 거듭해왔다.북한은 경제난으로 요약되는 체제위기를 극복하려면 미국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계산을 한 것같다. 어차피 경제적 개방을 해야한다면 「미국의 보호」가 다른 어느 누구로부터의 보호보다 안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대화에서는 한국을 줄기차게 밀어냈다.제네바 합의사항중 가장 더딘 진척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남북대화다.북한은 핵협상 과정에서 한.미 이간질도 적잖이 통하는 재미를 보았다. 한국은 대북 경수로 제공의 경제적 부담을 대부분 떠안고있다.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운영에도 거부권을 갖는다.그러면서도 북.미대화에서는 구조적으로 언저리에 놓일 수밖에 없다.최근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빚어진 한 .미간의신경전은 어쩌면 북.미대화가 시작되면서 이미 예고된 것이라 할수도 있다.
한반도에 대한 한.미양국의 이해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 까닭이다.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두개의 한국을 전제로 한다.중국과의 전략적 관계설정의 연장선에서 검토되기 때문이다.한반도의 통일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운신을 어렵게 할지도 모른다.최근 미의회 평화연구소정책연구서에는 한국의 지나친 중국접근을 우려 하는대목이 들어있다.
미국이 두개의 한국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할 이유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짧지않은 대북 직접접촉을 통해 남북한이 직접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습득한 것같다.
따라서 남북한간의 중재자로 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내심 영원한 중재자로서의 「숙명」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인상마저 없지 않다.북.미관계는 지금 잠시 주춤하고 있다.KEDO의 활동은 당분간 동결되었다.
잠수함 사건과 미사일 실험설이 관련국가들의 신경을 곤두세웠기때문이다.물밖으로 드러난 잠수함처럼 불거진 북한내부의 정책적 부조화도 미국을 조금은 조심스럽게 한다.그러나 궁극적으로 미국은 이번 사태를 우발적인 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동안의 접촉을 통해 북한을 어느 테두리 안에 가두는데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북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합의는 끝내 지켜지리라는 자신감도 엿보인다.북한이 미국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관계 진전은 시간문제로 보인다.잠수함사건으로 급전된 한국의 대북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매달렸던 북한과,북한을 길들여두어야 할 미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연락사무소 개설은 사실상 거의 마무리됐다.내년 상반기중 이뤄질 것으로 보는 성급한 전망도 있다.베트남의 전례에 비추면 유해송환등의 문제를 거쳐 2~3년안에 정식 국교수립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현재 북한의 4자회담 수용에 얽혀 있는 대북 경제제재조치도 단계적으로 풀려갈 것으로 보인다.미국의 일부 외교관계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도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한다.
워싱턴=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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