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방송 "머나먼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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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남산에는 남산타워가 있다.케이블카도 있고 야외음악당도 있다.
그리고 그 산자락 한켠 가파른 계단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집들도 숨어있다.그 집들 가운데는 영희아줌마의 남산식당이 있고 세탁소도 보인다.
세탁소 앞집엔 세탁소집 내외,한수네 부자,형우남매등이 부대끼며 살고있다.그들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돌아서면 금방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살아간다.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운명처럼 감당하면서.
그러나 형우(이창훈 분)만은 그런 자신의 삶을 혐오스러워한다.그는 항상 탈출을 꿈꾼다.영희아줌마 딸 상희(오현경 분)는 혼자 탈출하기보다 그런 현실 자체를 바꾸고 싶어한다.그래서 그녀는 학생운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시도한다.연인사이 지만 「머나먼 나라」를 향해 떠나는 두 사람의 여정은 사뭇 다르다.
형우가 도달하고 싶어했던 운하(김희선 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계층의 하향이동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한다.운하의 주위를 맴도는 한수(김민종 분)역시 아버지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맨다.
KBS 2TV 수.목드라마 『머나먼 나라』는 심각한 주제를 무겁게 풀어간다.경제적 고속성장의 와중에서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로 구분돼버린 계층간의 간극이 진중하게 다뤄진다.「가지지 못한자」에 속한 이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열 망과 좌절및고통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머나먼 나라』는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보여주면서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고 진지하게 호소한다.그래서 이 드라마는 집중해서 봐야하고 생각하면서 봐야한다. 많은 시청자들은 남의 일로 마음의 부담을 갖고싶지 않아 이런 드라마를 회피할 수도 있다.중산층으로서는 자기 일도 아닌일에 괜히 골치만 아파지니까,당사자들에게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드라마를 통해서까지 확인받고싶지 않아 외면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드라마를 통해 심화돼가는 계층간의 갈등을 짚어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매우 유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소재의 다양화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요즘 우리 드라마는 대부분 「사랑」과 「가족」이라는 두가지 소재로 고착돼 있다.이 두 소재는 달콤하고 부드럽고 편하다.
그래서 신경쓰지 않고 부담없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어쩌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될 수 있으면 가볍고 부담없게 다뤄왔다.이제까지 우리 시청자들은 부드럽고 달콤한 이야기로만 너무 편식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그래서 조금이라도 딱딱 해서 잘 씹어먹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에 대해선 쉽게 포기해버린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부드러운 음식,질긴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하듯 드라마도 마찬가지다.사람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드라마의 편식을 바로잡는데는 방송사.시청자 모두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머나먼 나라』는 편식증에 빠져있는 우리 드라 마의 체질개선을 위한 좋은 처방이라고 본다.
(女協 매스컴모니터회장) 전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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