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을/야동] 분노의 드롭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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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이야기다. 운동 잘하고 잘생긴 그는 인기 최고였다. 입담까지 좋아 쉬는 시간이면 그 애 곁엔 항상 아이들이 모였다. 그 녀석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밌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특히 ‘야한 이야기’로 아이들의 혼을 빼놨다. 그 애는 또 ‘야동 박사’였다. ‘야동’ 이야기를 꺼내면 우리는 우르르 모여 침을 꼴깍대며 들었다. 녀석에게 ‘물건’을 빌려준 애마저도 이야기에 홀딱 빠져들 정도였다.

우리는 그 녀석이 다양한 콘텐트와 무수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더 우리의 우상이 되어갔다.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딴판으로, 녀석은 똑부러지는 말과 행동으로 교내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나와 친구들은 그의 비밀을 파헤칠 음모를 꾸몄다. 우리는 과제를 핑계로 그의 집으로 갔다. 당황하는 그와 다르게 어머니는 과일과 주스를 내오셨다. 열심히 공부하고 가라는 말씀이 양심을 찔렀지만 그건 한 순간이었을 뿐, 본능은 양심을 무찔렀다. 우리는 녀석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완강하게 야동을 내놓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우리는 녀석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놓고 수색을 시작했다. 책장·옷장·서랍과 침대 밑, 심지어 창틀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은닉이었다. 갖은 ‘고문’에도 녀석은 없다고 발뺌했다. 우리에게는 비장의 카드, 도스 시절부터 쭉 컴퓨터를 만져온 컴퓨터의 달인 김컴달이 있었다. 컴달은 단 3초 만에 원하던 자료를 찾아냈다. ‘야동’을 쳐넣자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검색 결과들, 우리는 환호했고 녀석의 얼굴은 납빛이 되었다. 폴더를 여는 김컴달의 손은 재빨랐다. 그런데 이게 뭔 소리?

스피커를 통해 터져나오는 사운드…. “이치로 레이저 빔~!!” 기대와 다르게 눈앞에 뜨는 영상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 이치로 선수의 환상적인 홈 송구 장면이었다. ‘야동’ 폴더의 영상들은 모두 ‘야구 동영상’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무수한 경험도 다양한 콘텐트도 없었다.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잘하는 녀석이었을 뿐이다. 허탈감에 우리는 녀석에게 분노의 드롭킥을 날렸다. 그 친구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친구야.

김태식 (24·서울시 성북구 종암1동·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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