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국제화의 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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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초가을 날씨가 상쾌한 워싱턴 거리에 윤기 흐르는 검은색 리무진 승용차 몇대가 꼬리를 물며 미끄러져가는 모습이 매우 윤택하다.1일부터 나흘간 이곳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연차총회 때문에 이곳에 몰려온 한 국대표단 일부의 시내 이동광경이다.
두 기구의 회원이 각각 1백80개국이 넘다보니 워싱턴이 북적거리게 돼있지만 그중 1백50여명의 한국 대표단은 당당한 규모다.부총리를 비롯한 금융기관의 장(長)들과 그 아래 고급관리들,금융계 간부 등 명실공히 우리나라 재정.금융을 주무르는 핵심그룹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다소 많은 대표단이 워싱턴을 휩쓸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다는 주장도 있음직하다.한국은 이미 88년 IMF자금을 전액 상환했고,IBRD로부터 돈을 빌려쓰는 국가에서 졸업해 이제는 어엿한 신용공여국(供與國)이다.그러나 구름같이 몰려 온 이들의 활동상황은 어떤가.물론 부총리가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다수가 리셉션에도 참가했다.문제는 내실이다.적지않은 사람들은 윗사람 뒤를 따라다니는 「깃발 부대」다.상사 모시기에 바쁠 뿐이다.부총리정도 빼놓고는 많은 부하들을 몰 고 다니는 윗사람이라고뾰족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다.위.아래가 오십보(步),백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회의에는 각국 정부의 재정분야 고위관료들과 주요 금융인들이 폭넓게 참가한다.IMF는 또 서방선진7개국(G7)정상회담의 사무국역할을 담당하는 기구이기도 하다.우리나라에서 기왕에 많은 고위인사들이 참가한다면 위는 위대로,그아래는 아래대로 주요 국가들의 상대자들과 알맹이 있는 접촉을 벌일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각국 대표들이 그러한 모임을 차질없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총회준비사무국은참가자명단을 진작부터 마련해놓았다.
불행히도 한국 참가자들의 경우 이 명단이 사전에 활발히 활용돼 모임들이 물샐틈없이 준비됐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은 상태다.
한국이 국제화의 기치를 화려하게 내건지도 웬만큼 기간이 지나고 있다.다른 일도 마찬가지지만 국제화도 구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그러나 「아직도 멀었다」는 비판을 IMF총회 참가자만 뒤집어 쓴다는 것은 억울한 것 같다.
국제화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재외공관도 예외가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주미 한국대사관 주재관이 한국 출신 미해군 군무원한테 서투르게 정보를 수집해온 행동이 드러나 사실상 본국으로 쫓겨가게 된 것은 수치다.정보수집활동 자 체를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그 방법의 치졸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다. 통신분야 시장개방문제를 놓고 최근 한.미 관계자들이 협상을 벌였다.양국 협상 때마다 반복돼 온 일이지만,본질문제와 별개로 협상대표들의 격(格)을 둘러싸고 한국측이 속을 끓인 것으로 들린다.미국의 대외통상협상을 담당하는 미무역대표부 (USTR)구조의 특성때문에 하위급 실무자가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를 상대로 협상을 벌이면서 거북스러운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 것같다.과거에도 서로의 이해(利害)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경우 이들의 오만한 언동 때문에 한국 고위협상대 표들이 수모당한 일도종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의 국력과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외국과의 관계가 달라지고있다.이제 대외관계는 국제화 구호에 걸맞게 형식보다는 질(質)위주로 세련되게 바뀌어야 한다.알맹이도 없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던 형태는 지금까지만으로 충분하다.겉모양만 갖 추고 할 일 다했다고 행세하는 것도 기만이다.형식적 연설이나 리셉션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아울러 대외창구의 다양화가 시급하다.관리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곤란하다.업계 등 민간부문을 대외문제에 활용하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민간은 공동이해가 걸린 해외 파트너들이 있지 않은가.민간요소를 활용하는 로비를 찾아 볼 수 없는 불모지가 우리대외관계의 현주소다.
(미주 총국장) 한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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