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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컨셉트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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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TV 오락 프로그램의 대세는 ‘캐릭터’다. 출연진들이 확실한 캐릭터를 가질 때만 성공한다. 곤혹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스타들의 반응을 사전 연출 없이 보여준다는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대표적이다. 자막을 통해 캐릭터에 맞는 별명을 붙여준다. ‘1박2일’의 이승기는 미소년의 허술한 틈새를 보여줘 ‘허당승기’, 아이돌 출신 은지원은 철없는 ‘은초딩’으로 불린다.

드라마도 아니고 사전 대본도 없지만 캐릭터 역할극이 드라마 못잖은 재미를 자아낸다. 요즘은 매사 엉뚱하고 비상식적인 ‘4차원’ 캐릭터가 인기다.

캐릭터는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진상’ ‘밉상’ 등 비호감을 자처하는 것도 있다. 비호감이라도 캐릭터가 있는 편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는 얘기다. 매사 완벽해 나를 기죽게 하는 가상의 ‘엄친아(엄마친구아들)’처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캐릭터도 있다. 웹상에서는 메신저 아이디 등 온라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캐릭터 한두 개쯤은 누구나 갖고 있다. 드라마도 줄거리 못잖게 캐릭터가 재미있어야, 드라마도 뜨고 배우도 뜬다.

이쯤 되면 캐릭터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개성과 자기 표현에 대한 열망이 가장 큰 요인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튀지 않고서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힘들다는 절박감도 느껴진다.

최근 가요계의 ‘중독성’ 코드도 비슷하다. 따라 하기 쉽고 한 귀에 들어와 박히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춤이 히트의 요인이다. ‘텔 미’ ‘노바디’ 등의 원더걸스가 대표적이다. 반복적인 한두 구절로 승부하는 CM송 스타일에, 가수·춤·노래를 포괄하는 캐릭터가 중시된다.

저스틴 와이어트는 『하이 컨셉트-할리우드 영화 마케팅』에서 25자 미만으로 요약할 수 있는 영화를 ‘하이 컨셉트 영화’라며 이런 단순함이 흥행의 필수요소라고 지적했다. 복잡하거나 심오해서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예술영화와는 정반대다.

어찌 보면 캐릭터 열풍이나 가요계의 ‘중독성’코드나, 이 ‘하이 컨셉트 컬처’의 일환이다. 최대한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유아적·유희적이다. 캐릭터 놀이라는 것도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 안으로 밀어넣고 단순화·유형화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만큼 ‘하이 컨셉트’ 대중문화가 실제 삶의 복잡미묘함을 담아낼 가능성도 줄고 있다는 얘기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