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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환율 방어보다 ‘실탄 아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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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폭탄 돌리기.”

기획재정부 핵심 관계자는 9일 서울 외환시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 시장에 남은 이들은 원-달러 환율이 나흘 새 200원 넘게 올랐는데도 더 오르는 쪽에 베팅을 하고 있다”며 “이 판에 정부가 뛰어들어 이익을 안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외환 당국이 달라졌다. 환율과 외환보유액 사이에서 외줄을 타던 당국이 강경해졌다. 환율을 붙들어 잡기보다 외환보유액을 지키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은행권의 외화유동성은 지원하겠지만 외환시장에 달러를 대거 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며칠 새 대규모 개입은 없었다. 9일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을 위협할 정도로 수직 상승하자 개입에 나서긴 했지만 규모는 미미했다. 한 외환 딜러는 “당국 개입 물량은 2억 달러대로 추정된다”면서 “그런데도 환율이 장중 최고가에 비해 110원이나 떨어진 것은 시장의 예상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쏠려 기반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외환 당국이 이렇게 돌아선 이유는 글로벌 금융시장 경색이다. 은행들의 중장기 달러 조달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비상금’으로 남겨둬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올 들어 환율을 방어하느라 225억 달러나 썼지만 외환보유액 감소가 번번이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 증폭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고려됐다. 한 외환 당국자는 “환율은 어차피 조정받게 돼 있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선 외환보유액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과 심리전을 벌이는 측면도 있다. 환율이 급등할 때마다 달러를 조금씩 푸는 행태가 시장에 내성을 키운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재정부 관계자는 “이미 당국과 시장의 벼랑 끝 대치가 시작됐다”면서 “환율이 치솟을 때마다 정부가 시장에 달러를 대주는 일은 없을 것”고 말했다.

대신 정부는 수출기업들의 금고에 쌓인 달러를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민간의 팔을 비튼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수출기업들을 독려해 달러를 내다 팔게 하겠다는 것이다.

당국의 전략 변화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훈수’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최근 강만수 재정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최고경영자 시절 경험담을 소개하며 “경영자들이 달러를 내놓지 않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사람들이 달러를 내놓을 수밖에 없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외환 당국자들은 “대기업들이 달러 매도를 미루다가는 큰 손실을 볼 가능성이 많다”며 강력한 경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9일 아침엔 재정부 외환 라인이 수출기업 자금 담당자들을 직접 만나 달러 매도를 요청했다. 삼성전자 등 수출업체들은 이날 상당한 규모의 달러를 팔았고, 이는 환율 급락의 계기가 됐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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