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한국의역군들>12.고려대 생명공학원 신정섭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보리와 쌀.이 두가지만큼 관계가 미묘한 곡물도 드물다.과거 경제가 어려울 때는 각각 빈부의 상징으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한 쪽이 부족하면 다른 한 쪽이 빈자리를 채우던 보완(?)관계이기도 했다.
수입개방이다 뭐다 해서 쌀이 궁지에 몰린 요즘 보리가 다시 「쌀을 돕겠다」고 나섰다.혹한기를 거뜬히 이겨내는 겨울보리가 자신의 이런 장기(長技)를 벼에 빌려줘 냉해(冷害)를 막도록 하겠다는 것.
고려대 생명공학원 신정섭(申正燮.37)교수는 벼와 보리의 이같은 협력을 총지휘하는 식물분자유전학자다.申교수 연구의 핵심은냉해에 강한 보리 유전자를 뽑아 벼에 옮기는 것.그는 미국 몬태나주립대 유학시절 여러가지 보리의 유전자간 관 계를 처음으로분석해 관련학계의 주목을 받은바 있다.
이번 보리연구도 몬태나주립대.농진청 맥류과(麥類課)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연구의 첫 단계는 내한성(耐寒性)유전자를 찾아내는 것.발아(發芽)된지 2주 정도 지난 어린 보리를 섭씨 25도 안팎에서 키우다 갑자기 영하로 온도를 떨■ 뜨리면 이와관련된 유전자가 작동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申교수는 보리의 내한성과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10여종의 유전자를 파악해 놓았다. 다음은 찾아낸 내한성 유전자를 벼의 조직배양세포에 집어넣는 것.금이나 텅스텐으로 내한성 유전자를 포장해 지름 1미크론 이하의 초미세 입자로 만든 후 마치 산탄총 쏘듯이 벼의 세포에 이식하는 것이다.
이같은 방법의 효율이 좋지 않을 경우 유전자 운반용 박테리아를 사용할 수도 있다.벼와 보리는 화본과로 같은 과(科)에 속해있지만 속(屬)이 달라 서로 교배가 불가능한데 최근 날로 발달하는 유전자 조작기법 덕분에 유전자 몇개를 옮기 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편.최소 3~4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우선 수확기 냉해로 인한 벼 감산(減産)을 막을 수 있고 벼재배의 북방한계선을 현재의 위도 39도 이북으로 끌어올릴 수도있다.申교수는 『벼 재배 한계선을 위도 1도만 북방으로 넓혀도통일시대 식량자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申교수의 이번 보리연구는 그 자신이 농촌(경남밀양)에서 자란 것이 큰 도움이 됐다.보리가 추운 겨울을 얼어죽지 않고 난다는 것도 그때 얻은 아이디어.그는 『각종 작물을 어렸을 때부터 대해온 탓인지 실험을 하면서도 벼나 보리 에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77년 고려대 농대(현 자연자원대학)에 진학한 것도 같은 맥락.기계나 전기같은 쇠붙이류와 씨름하는 것보다 한결 「인간적」이어서 좋다고.
그는 보리연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5억~10억원규모의 농림부 자금을 받아 동료교수들과 함께 가뭄과 염분 등에 잘 견디는 벼 개발에도 곧 착수할 계획이다.부인 강효미(姜孝美.36)씨와 1남1녀를 두고 있다.
김창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