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펀드매니저들 “자정 무렵 퇴근, 집에서도 일 … 얼마나 버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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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위기 여파로 런던 증시가 6일 오전(현지시간) 개장하자마자 4% 이상 급락하자 증권사 직원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런던 AP=연합뉴스]

세계 최고의 직장이란 말을 듣던 대형 투자은행 펀드매니저들이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좌불안석이다.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홍콩의 전·현직 펀드매니저들을 특파원들이 각각 인터뷰해 이들의 요즘 삶과 애환을 담았다. 망하지 않은 회사의 직원(파리), 회사는 파산했지만 다른 곳에 인수돼 아직 일하고 있는 직원(뉴욕), 사실상 해고된 사람(홍콩)으로 구분했다. 인터뷰 당사자들의 요청으로 이름은 가명을 썼으며, 회사는 밝히지 않았다.

직장 유지

파리 대형 금융사 다니는 실비
출근해 미 증시 확인
“제기랄”로 업무 시작

파리에 사는 실비(26·여)는 3일(현지시간) 오전 6시가 채 못 돼 잠에서 깼다. 휴대전화의 메시지 도착 벨소리 때문이었다. 더듬더듬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미국 증시 상황 체크해서 오전 7시30분 회의에 나올 것’. 팀장의 문자다. 2주 전부터 거의 매일 회의 소집이다.

그는 프랑스의 대형 금융회사에 다니는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다. 그러나 요즘 그의 생활은 한마디로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채권팀에서 일하는 그는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된 이후 하루도 단잠을 잘 수가 없다. 그가 굴리는 돈은 1억5000만 유로(약 2500억원). 평소에도 하루에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이 몇 번씩 파도 치는 요즘은 주로 지옥에 있다.

아침 식사는 에스프레소 한 잔과 바게트 빵 한 조각이 전부. 허둥지둥 회사로 달려 나가 도착한 시각은 오전 6시50분이었다. 인터넷으로 미국 증시 상황을 살핀다. 실비가 투자한 곳은 모두 폭락뿐이다. 미국 증시를 분석한 미국 뉴스 사이트를 살피고 회의용 메모를 챙긴다. 7시가 되자 팀원들이 모두 출근해 실비가 했던 것과 같은 작업을 시작한다. 모두들 모니터를 켜자마자 “제기랄(merde)”이라는 말부터 내뱉는다.

오전 7시30분에 회의가 시작되면 모두들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지옥 같은 시간이다. 요즘 같은 때는 귀신도 투자 전망을 내기 어려운 지경이다. 누군가 어떤 분석을 내놓으면 이에 대한 반박이 들어오고, 투자 계획을 제시하면 부정적인 변수들만 늘어놓기 일쑤다. 때문에 회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그나마 회의가 있는 날은 행복하다. 지난주 미국의 워싱턴 뮤추얼이 파산한 날에는 눈뜨자마자 바로 회사로 출근해 아침 내내 미국과 유럽 증시 동향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 앉은 직원과 한마디 나눌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쯤 하던 기관투자가들에 대한 브리핑도 잦아졌다. 기관투자가들은 증시가 요동치기만 하면 바로 전화를 해 브리핑을 요구한다. 이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계획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면 곧바로 수백만 유로씩 빠져나간다. 지난달의 경우 평균 사흘에 한 번꼴로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낮 12시30분, 점심 시간이다. 평소 같으면 친구와 약속을 해서 직장 근처 레스토랑에서 느긋한 식사를 즐기곤 했다.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펀드매니저들, 특히 여성 펀드매니저들에게 점심 식사는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다. 두 시간여 동안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점심 식사라는 단어를 잊은 지 오래다. 12시30분쯤 구내식당으로 내려가 배만 채우고 10여 분 만에 다시 올라온다. 그나마 모니터를 체크하는 당번을 두고 교대로 식사한다.

저녁 퇴근은 보통 오후 10시를 넘어서 한다. 아시아와 중남미 시장에 대한 준비도 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직원이 야근 체제에 들어가자 회사에서는 구내식당에 피자 등 간단한 식사를 마련해 두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밤 12시가 다 돼서다. 그렇다고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미국 시장 등을 다시 점검하다 보면 오전 1시쯤에야 해방된다.

실비는 “프랑스의 밤 시간에 미국의 증시가 한참 돌아가기 때문에 밤새 인터넷으로 체크하는 경우도 많다”며 “자칫하면 하루 아침에 수억 유로의 손실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밤에 편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몇 주를 더 버티기 힘들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몇 번 투자 손실을 낸 직원에게는 배당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굴릴 돈이 없는 펀드매니저는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다 집에 가야 한다. 해고는 아니지만 사실상 직무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실비는 “최근에 실업자 아닌 실업자 신세가 된 직원이 적지 않다”며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매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직장 변경

뉴욕 투자은행서 일하는 밥

“흥청거리던 맨해튼
책상 없어질까 걱정
삼삼오오 신세타령”

초대형 금융 위기를 일으킨 미국 뉴욕 월가에서 요즘 유일하게 잘되는 곳은 술집이다. 시름에 잠긴 금융회사 직원들이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신세타령하거나 불안한 미래에 관해 함께 걱정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변 상가의 경기는 차디차게 식었다. 흥청망청했던 맨해튼 고급식당의 손님은 확 줄었다. 대신 핫도그·샌드위치를 파는 노점상들 앞의 줄은 눈에 띄게 길어졌다.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주말에 고급차를 빌리기가 불가능했는데 요즘은 얼마든지 렌트할 수 있다.

미국 굴지의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국제자산관리 파트 직원 밥은 요즘 초주검 상태다. 회사가 파산은 면하고 다른 회사로 인수된 덕분에 거리로 쫓겨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요즘 매일 아침 7시30분에 출근, 밤 11시나 돼야 퇴근한다. 초 단위로 널뛰는 전 세계 금융시장의 동향에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해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다.

밥은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초기만 해도 투자은행 직원들은 ‘우리야 뭔 일이 있겠느냐’며 방심했으나 최근 자신들에게 칼날이 날아오자 공포에 질린 상태”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당장 월급이 깎인 건 아니다. 그러나 연말이면 당연히 있던 ‘월가의 보너스 잔치’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연말까지 책상이나 없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게 요즘 월가맨들의 정서”라고 털어놓았다.

회사가 망해 거리로 쫓겨난 이들은 제발 다른 경쟁사들은 무사하길 빈다고 한다. “그래야 고용시장이 덜 나빠져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란다. 또 해고당한 사람 가운데는 내공을 쌓아두자는 취지에서 경영대학원(MBA)으로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내년엔 어느 해보다 MBA 입학이 치열해질 걸로 예상되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직장 파산

홍콩의 15년 경력 윌리

“병원서 우울증 치료
그래도 허탈감 들어
최근엔 종교에 귀의”

 15년 경력의 펀드매니저 윌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봉 100만 달러(약 12억원) 정도를 받았던 홍콩의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 전 홍콩 섬 중심부에 있는 주교좌(主敎座) 성당을 찾아가 신부에게 “이제는 성당을 다니며 정신적 안정을 되찾고 싶다”는 말을 했다. 신부는 “늦었지만 돈만 바라보고 달려온 인생을 뉘우치게 된 것은 한없이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성당을 찾은 것은 최근 실직자가 된 후 찾아온 정신적 공황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니던 미국계 투자은행은 지난달 말 파산했다. 그런데 이 은행을 인수한 회사에서 “인수하는 직원의 3분의 1에게만 올해·내년에 똑같은 보너스를 보장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이 범위에 들지 못했다. 물론 나머지 직원을 해고하겠다는 통보는 없었다. 그는 “계속 근무할 수도 있지만 연봉이 삭감되는 것은 물론 본격적인 인력 구조조정이 단행되면 연말께는 해고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융계에 실직자가 더 쏟아지기 전에 그만두면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헤드헌터 회사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하루 15시간씩 일했다. 너무 지쳤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등 두 번의 국제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살아 왔는데 이제는 회사가 파산하자 허탈감에 우울증 증세까지 겹쳤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았지만 허탈감을 치유하진 못해 아내와 협의 끝에 종교를 갖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홍콩에 있는 윌리의 금융계 친구 20여 명 가운데 10명 정도가 해고되기 직전인데, 윌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그는 전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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