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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3. 미국 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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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미국 보병학교 훈련 시험에 합격한 나(왼쪽에서 둘째)는 전쟁 중이던 1953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1951년 12월 보병 중위로 새로 임관한 나는 동해안의 5사단에 배속됐다. 사단장 전속부관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예비사단이었던 5사단은 52년 1월 일선 사단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양양에서 간성으로 올라갔다. 그때 건봉사에는 11사단의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투 중 실화로 사찰을 다 태웠다. 건봉사는 한국의 4대 사찰로 불릴 만큼 큰 절이었다. 신라 법흥왕 시절 창건됐을 때 이름이 원각사였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53년 1월, 나는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보병학교 훈련 시험에 합격했다. 한국군에는 훈련을 받은 장교가 부족했다. 장교 중에서 250명을 뽑아 150명은 미국 본토의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로, 100명은 포트 실(Fort Sill) 포병학교로 보내 6개월간 훈련시킨 뒤 일선 작전장교로 배치할 때였다. 총 5차까지 진행됐는데 나는 4차였다. 이전 멤버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로 가서 1개월간 소양교육을 받았다. 미국 풍물, 간단한 영어, 넥타이 매는 법, 양식 먹는 법 등이었다.

3월 15일 우리는 부산에서 미국 군함을 타고 20일간의 태평양 횡단 길에 올랐다. 매일 세끼를 양식으로 먹는데 20명이 앉는 테이블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가 한 명씩 배치됐다. 내가 “스크램블드 에그”하면 나머지 사람은 모두 “세임(Same)”하고, “프라이드 에그”하면 또 “세임”하는 식이었다. 한 달치 핫소스가 사흘 만에 다 떨어졌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 육군보병학교에 도착했다. 엄청나게 컸다. 넓이가 100만 평방마일로 세계 최대라고 했다. 훈련은 사격·학술교육·전술훈련 등이었다.

교내에 조지아대 분교가 있었다. 훈련 중이었지만 미국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일당을 아껴 25달러를 내고 ‘미국정치론’ 한 과목을 등록했다. 한국군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은 나였지만 미국 대학 강의는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훈련을 받던 도중인 7월 23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미 유학생들을 귀국시키도록 조치했다는 라디오 방송도 있었다. 포트 베닝의 유학생 단장은 손희선 대령이었다. 그는 아직 명령을 못 받았다며 교육에 계속 참가하게 했으나 포트 실에서는 교육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는 9월 2일 졸업식을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날 때 갑판에서 스카이라인을 보며 “언제 다시 미국에 오겠는가”하고 아쉬워했다. 그때는 나중에 미국을 안방 드나들듯이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9월 27일 인천에 도착한 우리는 대구로 가서 해산했다. 내가 배속된 27사단은 양양 낙산사 앞 벌판에 있었고, 나는 79연대 정보주임장교로 부임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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