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시험대에 오른 국가 위기관리 능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9월 위기설을 비롯한 갖가지 위기설이 난무하다 보니 국민들의 불안감만 증폭될 뿐 정작 위기의 실체에 대한 인식은 무뎌지는 모순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나라의 앞날에 대한 자신감과 방향감이 함께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위기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얼마큼 준비되어 있는지 먼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몇 주일 사이에 우리는 국가적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두 가지의 큰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첫째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중심인 미국의 금융체제가 연쇄도산의 위기에 몰리면서 이미 세계시장의 일부가 된 한국시장도 피할 수 없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이다. 둘째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와병설이 수반하는 불확실성의 위기로 그동안 북한의 고립정책으로 세계사의 예외지대가 되어버린 한반도에서 마지막 분단국가가 겪어야 할 민족적 시련의 위기이다. 하지만 위기의 진원지가 뉴욕이든 평양이든, 또 한국의 세계화와 북한의 예외지대화란 특수성이 각기 어떻게 작용하든 간에 이러한 위기는 우리 대한민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과연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이란 무엇인가. 위기의 성격과 내용을 정확히 진단하는 능력, 위기극복을 위한 적절한 대처안을 개발하는 능력, 특정한 대응전략을 선택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능력, 경우에 따라서는 동맹국이나 국제사회와 공동 대처체제를 조성하는 능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안정되고 일관성 있게 끌고 갈 수 있는 위기관리 시스템을 사전에 수립하고 운영하는 능력을 망라해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이라 하겠다. 특히 민주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위기관리 능력을 견지하는 최대의 필요조건이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와 그에 기초한 강력한 리더십임을 유의하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금의 위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뉴욕발 금융위기의 성격이나 미국 정부의 대처에 대한 경제전문가들의 평가는 이미 수없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정치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이번 금융위기는 통상적이 아닌 예외적인 심각성을 띠고 있기에 정부도 예외적인 대규모 구제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부시 행정부의 초기 대처는 진단의 신속성과 처방의 과단성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불과 몇 주 앞으로 다가온 예민한 시점임을 감안하더라도 의회의 동의를 얻는 데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것은 위기극복에 필요한 정치적 리더십이나 국민적 합의에 있어 한계를 노출한 셈이다. 이에 비하면 1990년대 초 스웨덴이 겪었던 경제위기, 즉 국내총생산(GDP)의 6%가 날아가고 실직률이 3%에서 12%로 솟구치며 금융시장의 90%가 파산 상태에 빠져버린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관건은 정부 대처의 신속성과 투명성에 더해 완벽한 여야 합의였다는 사실을 새삼 값진 교훈으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금융위기는 우리도 실감하며 당면한 위기임에 비해 평양발 불확실성의 위기는 잠재적 위기라 할 수 있다. 남북관계는 그 자체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에 우리로선 가급적 말은 적게 하고 준비는 철저히 챙기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 하겠다. 그런 가운데에서 남한도 북한도 흐르는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60년 대한민국은 얼마나 많은 변화의 고비를 넘어왔는가. 계속되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만 하면 오히려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반면 변화를 상황 타개의 기회로 삼는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다면 오히려 평화와 통일로 향한 전진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어떻게 모으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가 이룩하려는 민족공동체는 어떤 사회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나 희생을 치를 각오가 있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룩하는 것이 당면한 국가 위기관리의 초점이라 하겠다. 여야 지도자들이 함께 분발해야 될 국가적 위기가 바로 지금이다.

이홍구 칼럼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