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존 화두는 ‘Back to the Basic’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호 26면

이진혁 칼리온은행 서울지점 대표

“서둘러 기본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asic) 금융회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에겐 엄청난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고 본다.”

유럽계 IB 고수 이진혁 칼리온은행 서울 대표의 위기진단

칼리온(Calyon)은행 서울지점의 이진혁(43) 총괄대표. 지난 2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달러 기근이며 키코(KIKO),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같은 악재 불똥부터 얘기했다. “현장에서 보면 자금시장이 정말 심상치 않다. 지금 금융사들은 달러를 구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이 대표는 “최근엔 우리 회사에도 다급해진 국내 은행들의 SOS가 쇄도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경제의 덩치는 날로 커지는데 원화의 국제화를 소홀히 해 달러 아니면 대외거래를 할 수 없도록 방치했던 게 화근”이었다며 “이제라도 국내 기업들의 대외결제에 원화가 통용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구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그를 만난 건 프랑스 최대 은행이자 세계 6위 금융그룹인 크레디 아그리콜의 투자은행(IB) 칼리온이 지난 7월 한국 진출 35년 만에 현지 채용 한국인을 총괄대표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칼리온의 경영은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해 이 대표의 발탁은 아시아권에서도 최초의 현지인 총괄대표 임명이었다. 미국발 IB의 몰락이 세계를 강타한 시점인지라 ‘유럽계 IB 고수’의 머릿속에선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지 궁금했다.

이 대표는 ‘리스크’로 얘기를 풀어 나갔다. “미 IB들은 자본금의 35배까지 뻥튀기 투자를 했다. 이건 레버리지가 아니라 ‘사기’였다.” 그는 “미국의 규제 완화가 월스트리트의 영화를 가져왔지만, 이제는 그게 재앙이 됐다”며 “실물과 멀어진 금융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규제와 정부의 역할이 앞으로 월스트리트의 화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칼리온에선 박사급 우수 직원들을 리스크 전담 부서에 집중 투입한다. 또 해마다 수익의 36%를 리스크 관리용 시스템 투자에 쓴다. 이게 미국계 IB들과 다른 점이다.”

그는 “얼마 전 본사에 3개년 사업계획을 내면서 신용 파생상품 비즈니스를 중단하고, 금이나 원자재 파생처럼 위험회피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상품만 다루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크레디 아그리콜은 투자은행을 ‘CIB’로 부른다. C(Corporate·기업)자를 붙인 것은 기업금융이라는 본래 영역에 충실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유럽계가 이번 금융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그는 “크레디 그룹도 65억 유로(약 11조원) 넘는 부실자산을 떨어내야 했다. 회사 안에서조차 ‘너무 까먹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발 빠른 증자를 통해 신용등급이 유지됐고, 주가도 회복됐다. 이 대표는 “그 여파로 1만3000명 중에서 500명을 감원했지만 그 정도로 물린 게 다행이다. 초기 대응이 늦었다면 큰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고 숨을 골랐다.

그는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으면 그 다음부턴 ‘대박’이란 감이 온다”고 했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금융사 인수합병(M&A) 봇물이 터지고 IB 역할이 커진다는 기대감이다.

특히 자본시장통합법에 대비해 소매시장에서도 힘을 보여줄 작정이다. 이를 위해 국내 은행·증권사와 전략적 제휴를 했다. 은행 영업망을 통해 칼리온의 원자재 파생상품 등을 선보일 계획이다. 본사에서도 2002년 입사 뒤 900만 유로였던 서울지점 수입을 지금까지 8000만 유로로 끌어올린 그의 역량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정부에 대해선 “위기 국면에선 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정부가 외평채 발행을 포기하고 돌아온 데 아쉬움을 표시했다. “금리를 조금만 더 쳐줬으면 얼마든지 외평채 발행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줄이 완전히 말라 엄두도 못 낸다.” 정부의 상황판단 및 위기대응 능력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반영한 소리로 들렸다. 이 대표는 “달러의 본국 귀환을 반영해 국내 주가가 한 단계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이때가 주식을 사들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