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60km 은빛 날개, 단풍빛 물살 가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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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호 16면

9월 23일 열린 경원대 총장배 윈드서핑대회(뚝섬).

따가운 뙤약볕 아래 40여 기의 은빛 세일이 도열했다. 9월 23일 한강 뚝섬유원지 경원대 총장배 윈드서핑 대회에 참가한 아마추어 선수들이다. 출발을 알리는 에어혼의 고동 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바람을 타기 시작한다. 호접란처럼 널찍한 세일을 펄럭거리며 마치 나비가 비상하듯 펌핑(서퍼가 세일을 밀고 당기며 인위적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동작)을 품어 대자 바람을 탄 세일은 나는 듯이 질주를 시작한다.

가을은 윈드서핑의 계절

바람 부는 가을이다. 윈드서핑·요트·패러글라이딩…. 소위 ‘바람 레저’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천금 같은 계절이다. 이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마음은 언젠가 집채만 한 파도를 잡아타고 바다를 지배하고 싶은 서퍼(Surfer)의 마음, 거대한 고래와의 사투를 준비하는 늙은 어부의 마음과 같다고 할까.

나이 육십의 윈드서퍼 박홍한씨도 그렇다. 3년 전 윈드서핑에 빠져 이번 경원대 대회 일반부에 당당히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가로수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에도 가슴이 설레지요. 바람이 불면 이런 바람에는 어떤 배(보드)에 어떤 세일을 달아야 할지 본능적으로 계산에 들어간다니까요.” 윈드서핑 경력 3년의 박씨는 장비 구입에만 2000만원을 투자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다른 보드 6개, 세일 11개를 보유하고 있다. 강이냐 바다냐 환경에 따라, 바람의 세기에 따라 각각 전략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육십이 다 됐지만 10년 이상 탄 젊은이들한테도 안 질 자신이 있어요. 윈드서핑은 얼마나 많이 타 보느냐가 중요해요. 감이 중요한 거지”

윈드서핑의 매력은 단순히 바람을 지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날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닿아 있다. 수면 위에서 비상을 꿈꾼다는 것은 무리로 보이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지난 3월 프랑스 카날 호수에서 열린 윈드서핑 스피드 경기에서 기록한 세계 최고 기록은 49.09노트(90.91㎞/h), 순간 최고 속력은 시속 100㎞를 넘겼다고 한다. 수상스포츠 전문가들은 보통 수면에서 달리는 체감속도는 지상에서보다 두세 배는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물에서 시속 100㎞로 달린다는 것은 거의 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본부석 쪽으로 다가왔다. 이들 중엔 지난 베이징올림픽 윈드서핑 종목에 참가한 이태훈(경원대 사회체육학과) 선수와 이재철(거제시청) 코치도 섞여 있다.

“바람이 좋을 때 선수들은 시속 60㎞ 이상 타요. 동호인들도 몇 년 연습하면 50~60㎞는 탈 수 있죠. 윈드서핑은 운동선수들도 별로 싫증을 안 내는 종목이에요. 변화무쌍한 자연을 상대로 그 안에 나를 던져 넣는 것이기 때문에 늘 기대되고 흥분되죠.” 전 국가대표 이태훈 선수의 말이다.

이재철 선수는 베이징 올림픽 때는 국가대표 코치로 참여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RS:X 부문 일반부에 출전했다.

“윈드서핑은 일단 세일을 펴면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해야 해요.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어디로 배를 몰고 나갈 건가, 모든 전략과 전술을 스스로 짜야 해요. 그래서 저는 주변의 중·고등학생들한테 윈드서핑을 많이 추천합니다. 자립심을 키울 수 있거든요.”

경기가 치러지는 한강 뚝섬유원지. 강 한가운데서는 100여 대의 세일이 질주하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병아리 윈드서퍼가 많다. 윈드서핑에 처음 입문하면 세일을 얹고 달리는 것은 언감생심. 세일 없이 보드(Board) 위에 서서 균형을 잡는 훈련부터 한다. 클럽 앞 얕은 물에서 몇 시간째 십자가 자세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이주원씨는 그래도 즐겁기만 한 표정이다.

“한강에 오면 마냥 물만 쳐다보다가 윈드서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해 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거든요. 사실 오늘 세일은 올려 보지도 못하고 이러고만 있지만, 보드 위에 선다는 것만 해도 신기해요. 강사님 말로는 한두 번만 더하면 한강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대요.”

윈드서핑의 세일은 사이즈가 정말 다양하다. 처음 입문한 이들은 바람을 적게 받는 작은 삼각형 세일을 달게 된다. 입문자에게 센 바람은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윈드서핑과 같은 ‘바람 레저’를 잘하려면 육체적 노력과 함께 바람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돛단배는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가지만, 요트나 윈드서핑은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입문한 병아리들의 걸음마를 여유 있는 눈으로 지켜보는 이민재·신맹식씨는 3개월 정도 물을 타 본 초보자다. 두 사람 모두 40대에 윈드서핑에 입문해 “주말이 되면 물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매니어가 됐다. 1㎜ 검정 웨트슈트에 챙이 넓은 해병대 모자, 선크림을 두껍게 바른 ‘3개월 선수’들도 제법 머린 보이 냄새를 풍긴다.

“YMCA 라이프가드로 활동하고 있어서 수상레저라면 제법 하거든요. 수영도 하고, 웨이크보드도 하고. 근데 윈드서핑은 또 달라요. 일단 무동력이라는 매력이 있어서 물에 나가면 자연 외에는 구애를 안 받는다는 것. 또 바람을 이기려고 하면 벌을 받아요. 아무리 작은 세일도 제대로 된 바람을 받으면 무섭거든요.”

윈드서핑협회에서 추산하는 동호인 수는 3만~5만 명. 무엇보다 클럽이 서울에만 60여 개, 전국적으로 300여 개에 달한다. 이 중 여성 동호인은 15% 정도다. 요즘은 윈드서핑을 교양과목으로 채택한 대학도 많아, 올 한 해 한강 뚝섬유원지에서 처음 윈드서핑을 접한 인구가 3000여 명에 달한다. 경원대 사회체육학과 이영태 교수는 “우리나라는 수상레저가 꽃피울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특히 서울 지역은 한강이라는 자원이 있어 누구나 며칠만 투자하면 윈드서핑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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