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자료 2000여 건 요구하는 ‘묻지마 국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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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즘 국회에선 ‘소리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여야 간, 개별 의원 간 국정감사(6~25일)를 대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되풀이되는 장면이지만 올해는 유독 과열된 듯하다.

18대 국회의 첫 국감인 탓도 있을 것이다. 처음 치르는 만큼 의욕이 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감은 나흘 앞으로 닥쳤다. 그런데도 증인 채택에 합의하지 못 한 채 여야 간 소모전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2일 현재 18개 상임위 가운데 증인을 확정지은 곳이 절반이 채 안 된다.

1일에도 국회는 증인 채택을 둘러싼 공방으로 종일 요란했다. 여야 모두 100명이 넘는 증인을 신청한 정무위원회에선 고성이 오갔다. 특히 시중은행장들의 증인 채택을 주장하는 민주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나라당의 충돌이 거셌다.

양당 간 합의한 증인만이라도 우선 채택하려 했지만 이마저 무산됐다. 전체회의 의결 정족수(13명)를 못 채워서다. 2일에도 회의는 열리지 못 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개성공단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7일 열릴 국무총리실·국민권익위원회 감사의 증인 채택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게 됐다.

마구잡이로 국감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도 숱하다. 초선 비율이 45%(134명)에 이르는 ‘초보 국회’인 탓에 정밀한 자료 요청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자료까지 내놓으라고 할 경우 피감기관 업무는 지장받을 수밖에 없다”(경제 부처 출신의 한 경남 지역 의원)는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실제로 지식경제위원회의 한 초선 의원은 무려 2000여 건의 자료를 요청해 동료 의원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피감기관의 연보·인적 사항 등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바로 검색이 가능한 자료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국감은 의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끌어오기 위한 힘 겨루기의 무대가 아니다. 더구나 ‘묻지마’ 자료 요청으로 피감기관에 불필요한 업무 부담을 줘선 안 된다. 불필요한 소모전은 국정을 감시하는 국감(國監)이 아니라 나라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국감(國減)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 국회엔 매일 평균 1000여 명의 국민이 참관을 온다. 다섯 살 유치원생부터 여든 살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국정을 감시하는 게 국회의원의 특권이라면, 국민은 그 특권을 감시하고 있다. 국감 증인 채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국회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에 바짝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세금 갖고 장난칠까 봐 감시하러 왔지유.”(2일 충남 서천군에서 국회 참관을 온 한 60대 남성)

정강현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