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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스의 피플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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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이 1992년 독립을 선언하자 그루지야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93년 8월 끝났다. 그때 압하지야에서 그루지야로 피신한 여성들은 지난 몇 달간 역사가 뒤로 거슬러 가는 것을 목격했다. 15년 전 경험했던 모든 것이 되풀이됐다.

러시아의 공격 이후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그리고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그루지야 지역으로부터 난민이 쇄도하고 있다.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만 500개가 넘는 난민촌이 있고, 상당수의 여성과 어린이가 음식과 약품의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루지야인 대부분은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남오세티야의 지배력을 되찾겠다는 어리석은 시도로 그 지역의 평화 유지를 맡고 있던 러시아군이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도록 도발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지역 밖으로 그루지야 군대를 몰아내는 데 군사력을 전환했고, 그루지야의 영토 일부를 점령했다. 그루지야의 수많은 전략적 요충지와 민가에 폭탄을 투여했고, 수도·전기·학교 등 기간 시설을 파괴하고 음식·연료·약품의 부족 사태를 악화시켰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 침략한 러시아와 승산 없는 충돌을 도발한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서로 다른 민족으로 이뤄진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문화와 전통, 빵과 와인을 공유하며 각자의 문화와 언어를 서로 존중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영국, 오스만 제국이 맞붙었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들은 정치가와 군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착취당해 왔다.

그렇지 않아도 해묵은 가부장적 전통으로 힘들어했던 여성과 어린이들은 이번 충돌 기간 동안 더욱 큰 고통을 받았다. 15년 전 전쟁이 남긴 상흔, 20년간의 경제 공황, 현재의 러시아 침략에 이르기까지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그리고 그루지야 여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다. 러시아 병사들은 물건을 훔치고 여성들을 성폭행함으로써 시민들에게 복수했다. 게다가 무법천지 상황을 틈타 강도들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 난민들이 남기고 간 재산까지 훔쳐갔다. 러시아나 그루지야 정부가 통제하는 조직이 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기 위해 내놓는 보고서와 분석들은 양 민족의 틈새를 더욱 벌려놓을 뿐이다.

러시아와 그루지야 모두에 관련된 시민들은 최근 몇 달간 협력 관계를 만들고,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와 조직 밖에서 서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타민족 사이에 더 큰 벽을 세우려는 정부를 용납하지 말 것을 지역인들에게 호소하고, 성명서를 인터넷에 유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이 그루지야인의 위에 있지 않고, 그루지야인이 오세티야나 압하지야 사람보다 위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국가적 자존심과 지배·통치의 욕구에 기반을 둔 영토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완전 통치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 정부는 이 지역에서 물러나 지역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그루지야·러시아·압하지야, 그리고 오세티야 시민들이 함께 제국의 체스게임을 끝내야 할 시간이다. 수천만 명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을 고향에서 내쫓고, 정신적으로 상처받게 만드는 게임은 중단돼야 한다. 지역 시민사회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도록 도울 때다. 각 지역의 여성 인권 활동가들은 민족주의와 영토 분쟁의 덫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이용하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활동가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립적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줘야만 한다.

안젤리카 아르튜노바세계여성기금 CIS 담당관
정리=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