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60주년 세계석학 특별기고 ④.끝 외교적 선택 가능성을 늘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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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강한 나라인 동시에 약한 나라다. 강한 나라로서의 한국을 나타내는 것은 경제적 성공이다. 1950년대 필리핀은 아시아의 희망으로 불렸고, 한국은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과 필리핀은 경제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성공 뒤에는 한민족의 강인한 정신력,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 뛰어난 지도력 등이 있었다. 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어엿한 주역이 됐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정학적 측면에서 한국은 약한 나라다.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의 마지막 산물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국도 곧 통일될 것이란 기대가 높았지만 여전히 통일은 멀게만 느껴진다. 오랜 세월 강대국의 지정학적 체스 게임에서 무력한 인질이었던 한국은 아직도 인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어떤 강대국도 약한 동맹국의 이득을 자신의 이득보다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약한 동맹국의 전략적 관심사는 자주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최근 한반도의 정세는 비교적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미국·중국 양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힘이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경쟁에서는 아직도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외교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최대한 많은 선택 가능성(옵션)을 확보하는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지정학적 약점을 이러한 옵션의 다양성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불행한 과거가 있는 일본과도 균형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또한 한국에 좋은 외교적 선택을 제공할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유럽연합(EU)만큼 아세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세안이 EU보다 한국에 외교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EU는 경제적으로는 거인일지 모르나 지정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렇지 않다.

 아세안이 경제적으로 큰 중요성이 없더라도 지정학적으로는 다르다. 한국은 아세안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지만 외교적으로는 중요성을 부여한 적이 없다. 별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약함으로부터 아세안의 강함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중국·일본 등 강대국은 아세안을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세안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강국들이 모이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본 중국은 가장 먼저 아세안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켰다. 일본 외교관들은 이러한 중국의 예상치 못한 행보에 마치 하늘에서 날벼락이 친 것처럼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 또한 아세안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중국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한국은 명실상부한 서방 세계의 한 멤버다. 이러한 멤버십은 글로벌한 측면에서 한국에 많은 이점을 주는 한편, 지정학적으로는 위험에 노출되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서방 세계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루지야 등지에서 지정학적 실패를 되풀이해 맛봤다. 서방 세계 위주의 헤게모니는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많은 지정학적 이슈에 대해 OECD 회원국인 한국도 서방 세계가 취했던 입장을 따르도록 문화적 압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위치는 문화를 압도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은 서방의 문화적인 영향과 동양에서의 지리적 위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나는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확신한다. 이런 밝은 미래를 위해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경제적 측면에서 성공을 이끌어낸 지혜와 힘을 지정학적 무대에서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쇼르 마부바니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장

정리=중앙데일리 이준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