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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중년 남성들이여 정장을 벗어던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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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캐주얼=젊은층'의 도식은 깨졌다. '젊은 30대'를 지향하는 4050의 캐주얼 바람이 거세다. 슬림셔츠에 청바지도 어색하지 않다.

 올 6월 이탈리아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의 패션쇼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요지 야마모토, 앤 드뮐미스터, 에트로 등 굵직한 브랜드의 내년 봄·여름용 남성복 패션쇼 무대에 50~70대의 백발 성성한 모델들이 등장한 것이다. 요즘 패션쇼에 서는 모델은 남녀를 불문하고 10대 중후반이 대부분이다. 20대 중반만 해도 런웨이에 오르기 힘든 지경이니 이런 모델의 등장은 단연코 화제였다. 디자이너들이 이들 중년 모델에게 점잖은 옷을 입힌 것도 아니었다. 중년 모델은 20대가 입어도 손색 없을, 오히려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감각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아들들이여 조심하라. 아빠에게 당신의 옷을 빼앗기기 전에.

# 외모가 경쟁력이다

최근 삼성패션연구소는 ‘2008년 상반기 히트 아이템으로 본 국가별 마이크로 트렌드’ 보고서를 펴냈다. 마이크로 트렌드는 말 그대로 아주 작은 트렌드를 뜻한다. 특정 국가나 특정 시기에 국한돼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비슷한 수준의 문화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마이크로 트렌드가 ‘메가 트렌드’의 시발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그루밍족(族)’이 상반기 마이크로 트렌드라고 결론 지었다. 마부(groom)가 말을 예쁘게 빗질하고 목욕시켜주는 데서 유래한 ‘그루밍족’은 화장품을 비롯한 미용 용품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성들을 뜻한다. 미국의 남성 중에서도 그루밍에 열심인 계층은 30대 엘리트 남성과 사회활동을 지속하는 ‘베이비 부머’였다. 경제력을 갖춘 30대가 외모에 신경 쓴다는 것은 최근 몇 년간 계속해서 화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조짐이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팀장은 “경기 불황 시기 남성들이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며 이런 경향은 은퇴 시기에 있는 베이비 부머 세대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은퇴 압력이 거세질수록 그루밍으로 가꾼 외모를 무기 삼아 ‘아직도 나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고자 한다는 얘기다. 연구소 조사 결과 캐주얼 의류 시장에서 40~50대 남성 고객 비중은 98년 37%에 불과했지만 2005년부터는 50%를 넘어섰다.

# 패션 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라

일본도 이런 상황은 비슷하다. '레옹 족'이 그것이다. 중년 남성 ‘레옹’과 젊은 여성 '마틸다' 의 사랑을 그린 영화 제목을 그대로 본뜬 잡지가 2001년 9월 창간됐는데 이 잡지는 중년 남성의 패션과 스타일을 다뤄 화제가 됐다. 잡지 '레옹' 은 표지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센스'라는 문구를 넣어 중년의 소비욕을 자극했다. 현재 일본에는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 가 680만 명에 이르고 이들이 정년 무렵에 달하면서 총액 기준 50조원이나 되는 퇴직금을 겨냥한 패션 시장이 블루 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렌드 조사 기관인 인터패션 플래닝도 우리나라의 사례를 분석해 비슷한 결과를 내놨다. 내년에는 ‘바운드리스(boundless)’, 즉 경계가 없는 것이 뚜렷한 사조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측인데 이것을 40~50대 남성들을 겨냥한 캐주얼이 출시되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2000년부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현재 50대 이상의 가계 소비가 94조원을 웃돌 정도로 성장했다. 인터패션 플래닝 김혜경 실장은 “지금까지 패션 시장에선 20대가 최고의 소비층이어서 패션 업계 전체가 젊은 층 위주로 흘러 갔다”며 “그러나 이제 경제력을 갖춘 소비층인 40~50대에 브랜드들이 관심을 돌리고 있다. 요즘 40~50대는 ‘실버’라는 단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패션 마인드가 과감해서 ‘젊은 30대’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캐주얼=젊은층’이라는 공식이 사라지고 특정 연령대를 겨냥한 패션이라는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단 얘기다.

# 유행은 젊게 더 젊게

이런 추세는 실제로 올 하반기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달 19일부터 ‘다비드 프로젝트’라는 남성 패션 기획전을 열고 있다. 특이한 점은 중년 남성들이 즐겨 찾는 정장 브랜드에서 10~15% 정도 차지하던 캐주얼의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한 것이다.

실제 옷의 실루엣도 젊어졌다. 일반 셔츠보다 허리 라인은 5㎝, 소매통을 3㎝ 줄인 ‘슬림 셔츠’가 20% 수준에서 올가을엔 30% 비중으로 늘어났다. 몸에 꼭 맞는 이런 종류의 셔츠는 주로 젊은층이 선호하던 것이다. 롯데백화점 남성 MD팀 정윤성 팀장은 “남성 소비자의 패션에 대한 기호가 더욱 확실해지고 있는 데다 특히 중년층의 감각이 나날이 세련돼 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 맞춰 상품도 더 패셔너블한 것을 많이 제안하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올가을에는 ‘엘파파’라는 중년 남성을 타깃으로 한 캐주얼 브랜드가 새로 론칭했다. 광고 모델로는 중년 여성들이 선호하는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등장한다. 엘파파의 문진이 마케팅 팀장은 “젊어 보이고 싶은 아빠 세대가 이제는 아들 옷을 빌려 입는 게 아니라 아들이 세련된 아빠의 옷을 훔쳐 입고 싶게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중년 남성의 그루밍에 대한 관심은 옷뿐만 아니라 화장품으로도 옮겨 갔다. 여성들이나 바르는 것이라고 여겨지던 ‘안티 에이징’ 제품이 그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중년 남성의 주름 개선용 화장품을 선뵈고 있고 LG생활건강도 비슷한 개념의 제품을 내놓아 인기 몰이 중이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촬영 협조=이영인(모델), 엘파파(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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