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빨치산 흉내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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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총화가 시작되기 전 부대는 소대장 지휘아래 오와 열을 맞춰정렬했다.주석단 양옆으로 이영희대장과 부대 정치위원등 간부들이나란히 섰다.정치위원이 개회를 선언했다.「지금부터 6.25와 8.15해방을 기념한 캄파니아투쟁 성과보고대회 를 시작하겠습니다.」』(정순덕의『지리산은 통곡한다』중에서).
『하오부터 부산시내로 선전전을 나갔다.7일 부산에 도착,통일선봉대에 합류했다.하지만 큰 사건이 일어났다.머리를 맞고 뚝!세상이 아찔했다.밤12시 대구 도착.숙소앞에서 총화하고 있다.
경북대에서 미제축출 미군사유지.주둔비등을 주제로 총화를 했다』(연세대에서 농성한 한 여대생의 「투쟁일기」중에서).
( )속의 기록자를 빼면 어느쪽이 요즘 대학생 글이고 어느쪽이 빨치산 여장군의 수기인지 분간키 어렵다.연세대 사태를 지켜보면서 내겐 강한 의문이 일었다.어째서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혈전에 참여했고,농성학생중 여학생이 40여%를 차지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던 중이었다.이때 여대생의 농성수첩을 읽으면서 나는 요즘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빨치산 증후군」에 빠져든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됐다.
우선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너무 빨치산적이다.「레포」(통신문).「총화」(토론)등이 그대로고 조직 또한 빨치산을 흉내내고 있다.남총련 산하 전남대 오월대 조직은 불꽃중대.비호중대.죽창중대.진달래중대로 이뤄진다.이들 조직인 돌 격대.사수대.선봉대.규찰대 모두 빨치산 부대조직의 역할.명칭과 흡사하다.
나는 결코 이들이 북쪽 지령을 받아 진짜 빨치산처럼 게릴라전을 벌였다고는 생각지도 않고,그렇게 판단할 확증도 없다.그렇다면 왜 이들은 빨치산 흉내를 내면서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고 있을까.몇가지 관점에서 빨치산 흉내내기의 근원을 추 적해 볼 수있다. 구체적 현실을 문학적 감상(感傷)으로 혼동한 탓이라는 관점이다.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라아역을 맡은잉그리드 버그먼 같은 근사한 게릴라 센티멘털리즘에 빠진 것은 아닐까.빨치산을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가 근자 대량 생산되었다.『태백산맥』에서 『남부군』에 이르는 베스트 셀러가 있고,정순덕.김영등 실전 참가자들의 수기 또한 다양하다.내용의 상당수가잉그리드 버그먼식의 애틋한 사랑이 곳곳에 스며 있고 빨치산 곧민족해방군이라는 소영웅심리를 자극한다 .
나는 많은 여대생들이 통일축전에 참여하고 문선대같은 조직에 몸을 담게 된 동기에는 이런 문학적 센티멘털리즘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빨치산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는 없이 문학적 로맨티시즘만 무성하니 자연 감상적 빨치산 흉내내기에 몰두한 것이 아닌가.
그다음,빨치산 나아가 현대사 전반에 걸친 연구 부재와 잘못된교육이 수많은 대학생들을 빨치산 흉내내기에 몰두케 하는 요인이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연세대 사태를 보고 한국의 입시 위주 교육이 폭력시위를 부른다고 분석했다.대학입시 때문에 제대로 된 사회교육을 받지 못한 대학생들은 각종 소모임을 통해 따뜻한 동료애를 느끼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저항없이 받아들인다고 보았다.그들 나름대로의 불타는 이상주의와 예민한 정의감,희생적 애국심에 바탕을 두고 독점자본주의를 폭력으로 타도하려는 젊은 게릴라의 환상에 쉽게 빠져든다 했다.
최근 교육개발원 김명숙박사는 시민교육평가를 위한 설문조사를 했다.이중 「현재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국가는」이란 물음에대해 답한 교사의 41%가 미국을 꼽았다.특히 30,40대초반교사 대부분이 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교사들의 의식이 「모래시계 의식」속에 갇혀 있는 한,학생들의 빨치산 흉내내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해방에서 오늘까지의 현대사를 빨치산적 관점에서보는 역사의식이 사라지지 않는한 폭력시위는 근절될 수 없다.
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제대로 된 시민교육이 필요하고 현대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역사연구가 있어야 하는가를 연세대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한다.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현대사 교육속에서 우리의 대 학생들은 오늘도 빨치산 흉내내기를 통해 일종의 패션처럼 폭력시위속에서,농성속에서,탄압속에서 음습한 꿈을 키운다.정부와 대학과 역사연구가.교육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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