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패닉 긴 침체 ‘버블 스타’ 줄줄이 몰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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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28면

1.희생양을 찾는다

1720년대 영국 기업 사우스시의 최고경영자(CEO) 존 블런트, 1840년대 영국 철도왕 조지 허드슨, 90년대 엔론의 CEO 제프리 스킬링. 금융 역사가들은 이들을 ‘버블 시대의 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당시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칭송받았다. 이들의 경영 기법이나 부를 축적한 과정을 소개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학자들도 현란한 용어를 끌어다 그들의 경영 행태를 미화하기 바빴다. ‘엔론의 신경영론’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버블 붕괴와 함께 파국을 맞는다. 흥분과 추앙의 대상에서 분노와 원망의 대상으로 바뀐다. 온갖 추문이 불거지면서 그들은 결국 법의 심판대에 오르곤 했다.
최근 월스트리트 금융회사 CEO들의 고액 연봉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파산 신청을 한 리먼브러더스의 리처드 풀드 등 경영진이 파산 신청 직전 보유 주식을 처분한 사실도 드러났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금융회사의 불법행위 조사에 들어갔다. 조만간 대중의 분노를 터뜨릴 불법·탈법 행위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2.붕괴 도미노 일어난다

버블 분석의 대가로 미 MIT 교수(경제학)를 역임한 고(故) 찰스 킨들버거는 생전에 “버블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며 새끼 버블(Child Bubbles) 현상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실제 80년대 일본 버블의 주원인은 주식과 부동산이지만 그림과 골프 회원권 투기 현상도 덩달아 발생했다. 동시에 일본인이 많이 이민을 간 하와이의 땅값과 집값도 폭등했다. 또 20년대 재즈 시대엔 버블 현상 여파로 밀·구리·고무·아연 등의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 최근 원유를 비롯한 각종 현물 가격이 급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브릭스의 최근 호황은 글로벌 유동성 풍년과 상품 가격 급등에 따른 자산 거품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년대 미국 거품 시기에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이 원자재 수요 급증 덕분에 호황을 만끽했던 것과 비슷하다.

새끼 거품들은 메이저 거품이 꺼지면 곧바로 붕괴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공산이 크다. 세계 경제의 엔진인 미국은 물론 유럽의 실물 경제가 둔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의 정부가 절묘한 정책으로 침체를 예방하면 브릭스 등 나머지 국가의 경기가 연착륙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예측해 ‘닥터 둠’이란 별명을 얻은 마크 파버는 최근 블룸버그통신 등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거품 붕괴가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3.경제 패러다임이 바뀐다

버블은 경제적 규제 또는 고삐가 풀렸을 때 주로 발생했다. 네덜란드가 튤립 꽃송이를 놓고 베팅 열풍에 빠졌던 1640년 전후, 영국이 남미 투기에 흠뻑 취했던 1820년대와 새로운 교통수단 철도에 매료됐던 1840년대, 미국이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로 떠오른 20년대엔 자유방임이 시대정신이었다. 90년대 닷컴 거품 붕괴와 이번 거품 붕괴는 80년 이후 진행된 규제 완화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규제 완화는 미 여신관리 원칙도 바꿔 놓았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대공황 이후 70년대 말까지 금융회사들이 비생산적(투기적) 분야에 여신을 제공하면 전화를 걸어 주의를 준 뒤 제재하곤 했다.

하지만 폴 볼커와 앨런 그린스펀 시대의 FRB는 “어느 곳이 생산적이고 투기적인지는 시장이 결정한다”는 논리에 따라 금융회사가 투기적 분야에 돈을 제공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FRB의 이런 방침은 돈 풍년(유동성 급증)과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거품으로 이어졌다. 그 거품이 이제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될 전망이다. 버블의 수익은 소수가 차지한 반면 치유 비용은 미 국민이 떠안아야 할 처지다. 그동안 신자유주의에 눌렸던 반대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금융회사나 재계가 반발하겠지만 과거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11월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미 국민의 반대 목소리를 무시하기 힘들다. 시장에 대한 규제가 불가피할 것이란 얘기다.

4.패닉은 짧고 침체는 길다

금융 패닉은 신용경색 직후 찾아온다. 자산가격 급등으로 환희와 희망에 찼던 시장 참여자들이 한순간에 두려움에 휩싸인다. 자산가격 폭락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경제적 생존’을 위협받는다. 29년 10월 29일 대공황 직후가 대표적 예다. 패닉 현상은 대체로 2~6주 지속됐다. 하지만 버블이 꺼져도 패닉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80년대 가미카제 거품은 패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89년 12월 닛케이 225지수는 4만 선에 육박했으나 월말께 일본은행(BOJ)의 금리인상 직후 슬금슬금 주저앉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이 지수는 2만 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패닉이 발생하든 않든 버블 붕괴는 침체로 이어진다. 미국에선 1907년 금융위기 직후 3년 동안, 29년 대공황 직후 3년6개월 동안 경기침체가 계속됐다. 일본은 90년 이후 장장 10년 동안 경기침체가 이어졌다. 패닉 현상이 가라앉았다고 사태가 종료됐다고 봤다가는 큰코다칠 수밖에 없다. 딘 베이커 미 경제정책연구소장은 “주택 거품 붕괴로 거대 금융회사들이 무너지는 이번 금융위기는 80년 이후 발생한 어느 금융위기보다 심각하기 때문에 대공황 이후 가장 긴 침체가 예상된다”고 말한다.

5.정권 교체가 발생한다

32년 허버트 후버(공화당) 대통령 낙선, 93년 일본 자민당의 38년 만의 집권 실패, 97년 한국의 정권교체. 경제위기 직후 발생한 정권교체의 예다. 『경기침체기의 글로벌 투자전략』을 쓴 로버트 프렉터는 “옛날에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제사장의 목을 쳤듯이 대중은 버블이 붕괴하면 분노의 표시로 정권을 교체하려 든다”고 말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공황 시기인 32년이나 대부조합(S&L) 사태 와중인 92년처럼 지금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경제 현상인 버블 붕괴가 정치적 이슈로 비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동시에 거품 붕괴로 자산을 날린 사람과 경기침체로 직장을 잃는 사람이 속출하면서 사회적 갈등도 커진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집권자의 경제 정책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하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심지어 공적자금 투입을 경제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 정경유착의 증거로 인식한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문제를 야기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월스트리트와 백악관의 커넥션 때문이라고 간주해버린다. 8년 만에 정권을 되찾으려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 진영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오바마는 32년 당선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92년 당선한 빌 클린턴이 했던 것처럼 경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6.재계 지형이 바뀐다

아시아 금융위기 때인 97년 8~12월 이 지역 인수합병(M&A) 건수는 400건에 이르고 거래대금도 350억 달러에 달했다. 한 해 전 같은 기간보다 두 배나 급증했다. 위기 순간 수많은 기업이 흔들리거나 무너져 내리며 이른바 ‘기업 땡처리’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군소 은행에 지나지 않던 러시안 스탠더드은행은 98년 러시아 금융위기를 활용해 업계 1위로 성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도 세계 1위 복합 금융그룹으로 부상했다.

버블 시기엔 특정 산업에의 돈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닷컴 거품 시기엔 정보기술(IT)기업에 엄청난 자금이 집중됐다. 최근엔 상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철강과 석유회사에 많은 자금이 흘러들었다. 버블 붕괴 과정에서 이들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방만한 경영 때문에 무너진다. 하지만 살아남은 회사는 터를 잡고 선도 기업 반열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새로운 경제 엘리트의 부상’이라고 말한다. 20년대 거품과 대공황 시기 미 자동차회사 GM·포드·크라이슬러가 메이저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 대표적 예다. 닷컴 거품 붕괴 시기엔 이른바 웹 2.0 기업으로 불리는 회사들이 살아남아 확실히 뿌리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거품 발생과 붕괴 과정에서 미국이나 유럽 기업 가운데 새로운 메이저 기업으로 부상할 회사는 많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대신 글로벌 돈 풍년 시기에 막대한 현금을 확보한 중국·브라질·러시아 기업 가운데 이번 위기를 견딘 회사가 당당히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7.돈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버블의 원인으로 값싼 돈(Cheap Money·저금리 자금)을 꼽는다. 최근 10년 동안 주요 국가에선 낮은 금리로 쉽게 돈을 빌려 집을 사거나 소비를 확대할 수 있었다. 버블의 붕괴는 이런 값싼 돈의 종언이기도 하다. ‘한 푼을 아끼는 것이 한 푼을 버는 것’이란 생각이 다시 자리 잡기 시작할 것이다. 과시형 소비를 줄여 씀씀이를 절제하는 게 대세가 된다. 일본인이 80년대 온갖 명품을 탐닉하다가 잃어버린 10년 동안 ‘소비 망각증’에 빠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사태가 일본처럼 극단적 소비 기피로 이어질지는 현재로선 알 순 없지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업의 광고 메시지도 변화가 예상된다. 버블 붕괴 이전까지는 타인의 시선이나 스타일·취향 등이 강조된다. ‘나를 어떻게 드러내 보일까’ 하는 컨셉트가 광고의 테마다. 하지만 거품이 꺼진 이후엔 ‘실속’의 메시지를 내세운 광고 비중이 늘어나는 게 상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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