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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語병음 표기법 만든 경제학자 … 90세 넘어 책 10권 저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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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34면

1990년대 부인 장윈허(張允和)와 함께한 저우유광. 장은 영문학자며 저명한 곤극(昆劇) 배우였다. 송(宋)씨 3자매와 함께 명성을 떨쳤던 허페이(合肥) 4자매 중 한 사람이다. 김명호 제공

2007년 11월 1일 제5회 우위장장(吳玉章奬) 수여식이 열렸다. 언어문자학자 저우유광(周有光)이 5년에 한 번씩 수여하는 사회과학 부문 특등상을 받았다. 20년 전 궈모뤄(郭沫若)가 처음 받은 이래 다섯 번째 수상자였다. 저우는 102년 전 두부와 과거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장쑤(江蘇)성 창수(常熟)에서 태어났다. 밥은 굶어도 책 살 돈은 있는 그런 집안이었다. 강남의 공부 잘하는 부잣집 자녀들이나 다니던 상하이(上海) 성웨한(聖約翰·세인트 요한) 대학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개교 이래 가장 가난한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밤마다 일하며 꾸역꾸역 2년간을 다녔다. 졸업은 다른 대학에서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0> 저우유광(周有光)

1933년 남들처럼 유학을 떠났다. 결혼한 직후였다. 당시 상하이와 일본 간에는 비자가 필요 없었다. 배에서 하룻밤만 자면 도쿄였다. 우편요금도 국내와 같았고 물가도 비슷했다. 교토(京都)제국대학에 입학해 계속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의 청년 시절은 결혼 상대자와 연애한 것을 빼고는 모든 게 맹목적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일본 유학도 맹목적이었다. 후일 미국 유학도 마찬가지였다. 은행에 취직하자마자 해외 발령을 받았다. 영어를 워낙 잘했다. 뉴욕·런던 지사에 근무하며 대학을 다녔다.

뉴욕 근무 시절 프린스턴에 와 있던 아인슈타인이 말동무가 없어 무료해한다는 말을 들었다.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만나러 갔다. 국제정세와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놓고 얘기하다 돌아오곤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이기보다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였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 이유가 과학문명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저우유광은 사회과학 덕분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불과 2개월 전 런민(人民)대학 학술 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도 같은 주장을 했다.

49년 상하이가 해방되자 귀국했다. 조국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귀국했고 자신에게 희망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신중한 사람들은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있을 때였다. 귀국해 보니 세상에 쓸모없는 게 경제학이었다. 그 넓은 중국 천지 어딜 가도 마찬가지였다. 푸단(復旦)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신중국의 금융문제』『자본의 원시적 축적』같은 저술을 펴냈다. 취미 삼아 한어(漢語)병음과 자모(字母)에 관한 저술도 했다.

55년 10월 베이징에서 전국문자(文字)개혁회의가 열렸다. 저우유광도 참석했다. 폐회 후 문자개혁위원회에서 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였다. 경제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어병음연구실을 그에게 맡겼다. 엉터리 인사 같지만 아주 멀쩡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인사였다.

저우유광은 20년대 초반 대학 시절부터 문자에 흥미를 느꼈다. 성웨한 대학은 모든 게 영문이었다. 타자기를 사용하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편리한 게 있을 줄이야. 자모학(字母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외국에 갈 때마다 관련 서적, 특히 영국의 서적을 많이 수집했다. 일부러 영국 출장을 자원하기도 했다. 중국에 자모학 연구자가 없을 때였다. 취미로 시작한 것이 후일 유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20년대 상하이에는 어문 좌익운동가들이 있었다. 『어문』이라는 기관지까지 있었다. 저우유광에게도 몇 차례 원고를 청탁했다. 상하이가 신(新)문자운동인 라틴화운동의 중심지였을 때도 적극적으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저우유광은 3년 만에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중국어 발음 표기인 한어병음 방안을 완성했다.

85세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번역과 편찬을 한 것을 끝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세상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0세 이후에 문자에 관한 책을 10권 저술했고 100세 때 책을 한 권 냈다. 마지막 책이 아니라고 하더니 다음해에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는 지금 103세다. 지기(知己)였던 인민 문호 라오서(老舍)는 문화혁명 때 호수에 뛰어들어 세상을 떠났고, 홍루몽 연구로 마오쩌둥(毛澤東)과 한판 붙었던 위핑보(兪平伯)와 손아래 동서였던 작가 선충원(沈從文)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직도 친구들이 많다. 주로 옛 친구들의 손자나 증손자들이다. 82세 때 배운 컴퓨터로 밤마다 손녀들과 e-메일을 주고받는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무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쾌락이다”는 말을 근래에 자주 한다. 백세(百歲) 노인에 의해 현대사회의 상식과 지적 영양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것은 중국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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