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독립 놓고 60년간 4차례 사법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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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나라 사법 역사 60년은 오욕과 영광이 교차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 8월 5일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임명됐다. 같은 해 11월 1일 대법관 5명이 선출됐다.

법원의 역사는 아픔과 굴곡이 많았던 우리 현대사를 반영하고 있다.

58년 법원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세력으로 부상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에게 국가변란 등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61년에는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검찰은 시국사건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하고 영장을 기각한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반공법 위반 피고인의 변호사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에 전국의 판사 150여 명이 사표를 내며 반발했다. 이른바 ‘1차 사법파동’이다.


74년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민청학련’을 조종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23명이 구속됐다. 75년 4월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사형이 확정된 뒤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사법 살인’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79년 대법원장에 오른 이영섭 7대 대법원장은 신군부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2년 만에 옷을 벗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오욕과 회한의 역사’라는 말을 남겼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5공 때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했다. 소장 판사 335명이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 상주 폐지, 법관의 청와대 파견 중지 등을 요구했다. ‘2차 사법파동’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93년 6월엔 서울 민사지법 판사들이 중심이 돼 ‘3차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법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법관의 신분 보장과 법관회의를 요구했다.

2003년에는 서울지법 북부지원 이용구 판사가 법원 내부게시판에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글을 올리고 판사 144명이 서명하는 ‘4차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남성 법원장만 대법관에 임명돼 온 데 대한 항의였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여성 최초의 헌법재판관에 지명했다. 2004년 8월에는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첫 여성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듬해에는 통상의 경우보다 서열이 낮은 김지형 부장판사와 법원 개혁을 요구하다 사표를 냈던 박시환 변호사 등 이른바 진보 성향 인사들이 대법관에 임명됐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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