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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기찻길이 세계문화유산 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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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찻길 ‘레티셰 반 알불라/베르니나’ 구간에서 바라본 열차 밖 풍광.

당신은 스위스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걸 알고 계십니까.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Jungfrau)의 설경?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른(Bern) 시내의 골목길? 아니면 전 세계 부호의 휴양지 생 모리츠(St. Moritz)의 럭셔리 호텔?

그러면 두 달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찻길 ‘레티셰 반(RhB : Rhaetische Bahn) 알불라/베르니나(Albula/Bernina)’구간은 알고 계십니까. 천 년도 넘은 계곡길 비아말라(Viamala)에 켜켜이 쌓인 사연은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당신이 미처 몰랐던 스위스의 숨은 매력 두 가지를 공개합니다. 한국인 방문자 수가 확인이 안 될 만큼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곳입니다. 그렇다고 지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스위스는 여전히 보고 듣고 즐길거리로 넘쳐났습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알프스 기차여행을 꿈꾸는 당신을 위해-세계문화유산이 된 기찻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7월 7일 스위스 동남부 그라우뷘덴주를 관통하는 기찻길 ‘레티셰 반 알불라/베르니나’ 구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인류는 오스트리아의 젬머링(Semmering) 철도와 인도의 히말라야 철도에 이어 세 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기찻길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이달 초 그라우뷘덴 지역에서 전 세계 26개국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그 현장에 week&도 있었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간은 정확히 122㎞의 철길이다. 투시스(Thusis)에서 생 모리츠까지의 알불라 노선과, 생 모리츠에서부터 이탈리아 접경지대 티라노(Tirano)까지의 베르니나 노선이다. 모두 196개의 다리를 건너고 55개의 터널을 지난다. 구간 중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티라노가 해발 429.3m이고, 가장 높은 오스피지오(Ospizio)가 해발 2253m다. 1889년 공사가 시작됐고, 구간별로 노선을 확장하다 1910년 오스피지오-포스키아보(Ospizio-Poschiavo) 구간을 개통하면서 오늘의 노선이 확정됐다. 그러니까 레티셰반 노선은 유럽의 지붕을 잇는 지리적·건축적 의미와 100년 이상 묵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4일 온종일 각국의 취재진은 세계문화유산 철도를 체험했다. 오전에 경험한 구간은 산악 열차의 아찔한 경험이 여태 생생한 베르니나 노선. 기차는 두 시간 동안 부지런히 능선을 올랐고, 철로는 마침내 하늘과 맞닿았다. 기차가 멈춘 곳은 알프 그륌(Alp Gruem)역. 해발 2019m 언덕 위에 우뚝 선 기차역이다.

짙은 비구름이 기차역을 삼켜버렸다. 기차역에 머무르는 두 시간 동안 시야는 좀처럼 확보되지 않았다. 여기가 해발 2000m 고지란 사실을 새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기차역 바로 아래가 깎아지른 절벽이고 그 아래로 삐죽삐죽 가위 모양의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는데, 그 장관을 끝내 보지 못했다. 기차역 뒤로 우두커니 서 있다는 팔뤼산 정상(Piz Palue)의 빙하도 오롯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솜이불처럼 두꺼운 구름 사이로 기차역 전경을 잠깐 엿본 게 전부였다. 아쉬움은 거기까지였다. 알프 그륌 역에서 내려오는 길,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고원의 풍광은 선계(仙界)의 그것처럼 낯설고 황홀했다. 기차는 구름 위 세상에서 막 내려오는 길이었다.

오후가 되자 취재진은 알불라 노선에 올라탔다. 알불라 노선은 오전의 베르니나 노선처럼 광활한 고원 풍광으로 여행객을 압도하진 않았다. 대신 가파른 산기슭에 슬쩍 얹힌 듯한 기찻길이 위태위태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니나 노선이 하늘을 향해 고원을 내달렸다면, 알불라 노선은 첩첩산중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녔다. 알불라 노선은 베르니나 노선보다 29개나 많은 터널을 통과했고, 베르니나 노선보다 92개나 많은 다리를 건넜다.

열차가 지나간 수많은 다리 중엔 1902년 완공된 65m 높이의 랜드바저 비아덕트(Landwasser Viaduct)도 있었다. 스위스에서 중간 발판 없이 세운 가장 높은 다리이자 처음으로 돌을 쌓아 올린 다리다. 터널에서 나오자마자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136m 길이의 이 다리는 알불라 노선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오후 4시쯤 기차가 해발 1277m의 스툴스(Stuls) 역에 정차했다. 100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옛 역이다. 스위스 관광청은 전 세계 언론을 위해 여기서 잔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100년 전 지역주민의 생활을 재현한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알불라 노선이 놓인 그라우뷘덴 지역은 스위스 로마니시(Swiss-romanish)의 집단 거주지다. 로마니시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자체 언어를 쓰는 소수민족으로 스위스 인구의 1%에 해당한다.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로마니시의 공연을 지켜보다 문득 깨달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기찻길엔 빼어난 기술이나 그림 같은 자연 이상의 의미가 스며 있었다. 그건 100년이 넘도록 철길이 들여오고 건네준 수많은 사연이었다. 스위스의 독일어권-로마니시권-이탈리아어권을 연결한 뒤 마침내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철길은 스스로 스위스의 역사와 문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Tips

한국에서도 구입이 가능한 스위스 패스로 베르니나 특급노선을 이용할 수 있다. 별도의 예약비만 지불하면 된다.

‘산티아고의 길’을 동경하는 당신을 위해-비아말라의 사연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로 인해 유명해진 길이 있다. 이른바 ‘산티아고의 길’이다. 프랑스의 생장피에르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700㎞에 이르는 길이다. 산티아고는 성(聖) 야곱의 순교지로 알려진 곳으로, 10세기 이후 수많은 사제가 이 길을 순례했다. 하나 그건 역사에서나 그러했다. 코엘료에 따르면 그가 맨 처음 이 길을 걸었던 1986년 산티아고 순례자는 연간 400여 명 정도였다. 하나 2005년 현재 이 길은 매일 400명이 넘는 순례자(라기보단 관광객)로 넘쳐난다.

스페인에 ‘산티아고의 길’이 있다면, 스위스엔 비아말라(Viamala)가 있다. 길 위에 쌓인 세월의 더께를 따져도 비아말라는 ‘산티아고의 길’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비아말라는 코엘료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를 아직 낳지 못했을 따름이다.

비아말라 협곡에 세워진 다리 위의 모습. 다리 아래가 300m 낭떠러지다.

비아말라의 ‘비아(Via)’는 ‘길’이고 ‘말라(Mala)’는 ‘나쁘다(devil)’란 의미다. 그러니까 비아말라는 문자 그대로 ‘나쁜 길’이다. 그만큼 험한 길이란 얘기다. 지질학적으로 약 4000년 전 빙하에 의해 형성된 16㎢ 규모의 가파른 협곡지대다. 계곡 깊이는 300m가 넘고 폭은 3m에 불과하다. 계곡 아래로는 빙하가 녹은 시퍼런 강물이 맹렬히 흐른다. 그 계곡을 유럽인은 약 2000년 전부터 건넜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길 같지 않은 길을 왜 유럽인은 굳이 걸으려 했을까. 그건 지도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독일 남부의 중심 도시 뮌헨과 이탈리아 북부의 중심 도시 밀라노를 직선으로 이었을 때 그 직선 위에 정확히 비아말라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비아말라는 알프스 북부와 남부를 잇는 최단거리의 통로였던 셈이다. 그렇다 보니 중세시대부터 수많은 순례자와 상인이 목숨을 걸고 비아말라에 도전했다. 비아말라를 노래한 민요도 여러 곡 전해져 내려오고, 괴테·니체 등 대문호가 쓴 글도 남아 있다.

이 길을 이달 초 한국 언론 최초로 걸었다. 지역 관광청은 비아말라를 통과하는 하이킹 코스를 개발해 놓고 있었다. 투시스 시내에서 시작해 비아말라를 거쳐 질리스(Zillis)까지 걷는 6시간짜리 트레킹이다. 가파른 산을 오르기도 하고, 능선 위에 펼쳐진 평원지대를 여유로이 걷기도 하고, 계곡과 계곡을 잇는 구름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울창한 숲을 헤치기도 하고, 까마득한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난 길을 살살 디디기도 했다.

표고차 1200m를 오르내리는 트레킹이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은 건 길 여기저기에 밴 사람의 흔적 때문이다. 지금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잇는 생 고타드(St. Gotthard) 터널이 뚫려 잊힌 옛길이 돼버렸지만, 천 년 넘도록 교통의 요지였다 보니 아직도 유서 깊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컨대 트레킹 한 시간쯤 뒤 만나는 산중턱의 생 알빈(St. Albin) 교회는 비아말라 여행자의 무탈을 기도하던 곳이었다. 비아말라 트레킹의 종착지 질리스의 시내에선 153개의 목화가 천장에 그려져 있는 12세기 교회 생 마르탱스(St. Martin’s)를 볼 수 있다.

비아말라엔 지금 18세기에 세운 돌다리가 얹혀 있다. 다리 자체가 번듯한 문화유산이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중세 때 쓰였던 옛길의 흔적이 경사 70도가 훌쩍 넘어 보이는 산기슭을 따라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다리 아래로 321개의 계단을 내 수면 바로 위까지 내려갈 수 있게끔 해놓았다.

현대인은 왜 ‘산티아고의 길’을 동경할까. 그건 천 년의 세월 동안 그 길이 감당했던 역사의 무게를 느끼고 싶어서다. 길은 인류가 지상에 남긴 첫 흔적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인류 문명이다. 길을 낸 다음에 인류는 정착했고, 길을 낸 다음에야 인류는 영역을 확장했다. 비아말라에서 배운 길의 이치다.

Tips

한국에서 비아말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아직 없다. 여행책자에서도 비아말라는 찾기가 어렵다. 스위스의 비아말라 관광청(www.viamala.ch)이 비아말라 탐방 프로그램과 당일 일정부터 4박5일 일정까지 다양한 종류의 하이킹 코스를 마련해 놓았다. 하나 현지 자료도 태반이 독일어다. 스위스도 지난여름부터 비아말라 홍보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행 수첩

스위스에서 온갖 종류의 탈것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스위스 패스 구입 요령부터, 한국 여행사가 아직 상품을 만들지 못한 위 여정에 관한 정보는 스위스 관광청(www.myswitzerland.co.kr)을 통해 얻으시길. 아울러 스위스에선 여전히 스위스 프랑(1프랑에 약 1000원)이 널리 쓰이고 있으니 유로 챙겨갔다간 외려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명심하시길. 생산량이 적어 한국엔 덜 알려져 있지만 유럽에선 널리 인정받고 있는 스위스 와인(특히 화이트 와인)은 꼭 맛보시길. 대한항공이 일주일에 세 번(화·목·토요일) 인천∼취리히 직항 운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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