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역사의 희생자' 감싸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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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떤 일이든 성공 뒤에는 그에 맞먹는 대가와 희생이 있게 마련이다. 대한민국 56년의 역사가 성공의 역사라면 그 뒤에는 참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그러한 희생과 아픔에 대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렀는가. 지금이 한국사회의 역사적 전환기라면 바로 그렇듯 쌓인 한과 아픔을 풀어주고 치유해야 할 고비가 아닐까.

*** 냉전과 산업화 과정 희생 치러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과 성취의 역사라고 자부할 수 있다. 참으로 어려운 지정학적.시대적 악조건 속에서 우리는 나라를 세웠고 그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말할 수 없는 처참한 빈곤의 굴레를 벗고 30년이란 한 세대 안에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또한 깊이 뿌리박힌 권위주의적 전통과 체제를 극복해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성공이 가져온 뒷면의 희생과 아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국가적 대책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성공에 공헌한 사람들에게는 포상과 혜택이 주어졌다지만 고통과 모멸감을 묵묵히 견디어낸 다수에 대한 정의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단국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탄생하였다. 건국 과정에서부터 비롯된 치열한 내부 갈등은 급기야 한국전쟁이란 민족적 재앙으로 이어졌고, 급박한 상황에서의 위기의식과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배합된 반공정책은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고 말았다. 월북자의 가족이나 친지를 비롯해 좌경(左傾)으로 조사받고 처벌된 사람은 물론 의심의 대상이 된 사람까지도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과 그 가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우리 인구의 상당수가 될 것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들이 지닌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인식이 단순한 애국심보다는 훨씬 복잡하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의 인식과 정서를 정상화할 공동체적 노력이 미흡하였다는 데 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이란 성공의 이면에는 또 다른 희생이 뒤따르고 있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란 위치에 오른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농민.소시민들이 큰 고역을 치러야 했는가는 물론 산업화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나 집단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인지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산업화가 수반한 빈부격차와 상대적 빈곤감의 확대에 대해 공동체적인 인식과 대처가 미비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속도를 앞질러 대중적 불만이 더 빠른 속도로 확대 재생산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의 민주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는 4.15선거에서 한국정치의 새 주역으로 등장한 많은 정치신인이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안정된 제도화를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은 그들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며 혁명적 충동을 자아낼 우려도 없지 않다.

*** 국민 합의 이끄는 새 정치 기대

지난 50여년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성공과 성취의 영광보다도 이를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과 대가의 무게가 훨씬 커지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동안 쌓여 있던 한과 불만과 의심과 서운함을 차분히 풀어갈 정치체제나 사회계약의 부재(不在) 속에서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번 총선에 역사적 의의를 부과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덮어두거나 외면하려 했던 '성공의 대가'에 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사나 악연에 더 이상 시달리지 말고 한국인 특유의 창조적 순발력을 다 함께 발휘해야 할 때다. 이제는 의회민주주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진지한 대화를 통한 국민적 합의, 특히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국민적 확신을 굳히는 새 정치가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