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세상월령가 5월] 어떤 지중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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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이종구 작 ‘대해(大海)’, 50×65㎝,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4.

왜 큰 시야로 아시아 전체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껏 동북아시아만 말하느냐고 대기자 김영희가 나무란 적이 있다.

한국의 지식인 일군은 동구권 및 소련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새로운 지역담론으로 동북아시아 연대의 지적 탐구를 서둘렀다. 이는 한·중 수교와 함께 오랫동안 대륙과 단절되었던 휴전선 이남의 고독을 단숨에 보상받으려는 오랜 잠재의식도 반영한다.

이제 그 동북아시아 또는 동아시아 담론은 좋게는 심화확대되는 중이고 나쁘게는 상투화되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는 가장 긴 역사공간을 중국과의 절대관계로 존속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이런 일이 한국을 중국보다 더 중국적이게 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말 위정척사노선이라는 것도 장구한 사대주의의 위기가 낳은 산물이다.

현대 한국사회는 식민지 잔재 그대로의 토양에 해양세력으로서의 미·일과의 관계를 나날이 긴밀하게 만들어왔다. 남한의 이런 현실은 미·일과의 긴장관계를 지속시켜온 북한을 역설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정착된 해양세력에의 편향과 한반도 자체의 폐쇄적인 자의식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이 담론이 실현되는 일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먼저 동북아 3개국 실체의 하나인 일본이 이행해야 할 기본과제가 있다. 탈아론(脫亞論)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지금까지 너무나 서방적(西方的)이다. 이와 함께 한반도와 중국 대륙, 그 밖의 동남아시아에 고통을 준 침략의 역사를 청산하는 진실 없이는 안 될 것이다.

지난날 일제 야욕인 대동아공영권의 망령이 동아시아 담론의 중천에 아직 떠돌고 있지 않은가. 역사 청산의 모범은 독일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는 물론 그 밖의 다른 과오까지도 스스로 발굴해내어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사적 미덕이 독일을 현대 세계사의 명예로운 주축으로 만들어낸 바탕이 되었다. 지난해 서울에 온 작가 귄터 그라스가 일본은 한국에 대해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꾸짖은 것도 그래서 한층 더 울림이 있다.

지금 일본은 일본 사람 각자의 바른 예절과 달리 단 한번도 국가 차원의 예절인 사죄와 배상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거를 정당화하는 국민 정서를 조종하기까지 한다. 일본의 극우는 미국의 극우뿐 아니라 분단국 한국의 극우와도 체질적인 유대를 일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일이 태평양 해양세력의 아시아 전략에 힘의 배경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중국의 진보적인 개항의식(開港意識)으로서의 동아시아 담론은 일정한 허구성에 부닥친다. 하지만 최근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에서 제기된 바 아시아를 하나의 사유공간으로 인식하는 시도는 무척 역동적이기까지 했다. 아시아에 대한 아시아인의 시점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물론 아시아의 의미는 아직 모호한 측면이 있다. 헤겔과 베버, 그리고 뮈르달의 '아시안 드라마'와 또 다른 쪽에서 레닌은 러시아를 아시아국가로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정작 동북아시아가 언제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의식을 펼칠 수 있었던가.

하지만 이런 크기 문제를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면 정체성의 문제는 언제나 미래를 구성하면서 과거를 해석한다는 점으로 미뤄 동아시아의 미래는 반드시 이 지역의 자발적이며 포괄적인 탈식민의 주체가 될 때 해결될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은 국가에 앞서 문화영역에서 선행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행위가 반드시 정치행위와 별개의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 세계는 세계화의 대응 이외에도 지역공동체의 상생이라는 복합공존의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가령 상당한 인내심을 바친 유럽연합의 출현은 현대 세계사 최대의 사건이다. 인류의 한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의 극단인 국가해체론의 모험을 잠재운 국가연합의 새로운 대체제이자 일국주의를 극복한 복합국가의 실현인 것이다.

앞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이나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그리고 꿈속의 아프리카 단결기구와 라틴아메리카권역 결속의 의의들은 결코 퇴색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버마스가 말한 바 각 지역의 정치적 공공 영역을 수립하는 공민사회(公民社會)가 지구상의 여러 곳에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신자유주의 일방노선이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적 협의를 무시하는 오만을 조절하게 되며 일본 역시 일정한 질적 변화를 통해 동아시아 연대의 일원을 지향할 것이다.

나는 고대아시아의 보편성을 떠올린다. 6세기 이래 불교를 통한 아시아의 내재적 통일성을 이룩했고, 유교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가치체계로 소통시켰으며 이런 사실은 동아시아의 오늘에도 유효한 문화체계를 이룬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대아시아적 영감 속에서 살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동아시아 의식은 마치 동양 3국의 바둑경기처럼 국한적인 개념으로 퇴화한 느낌도 든다. 아직 허황하기는 하지만 장차는 절실한 것이 되어 마땅한 아시아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은 필요하다. 우선 동북아시아 담론만으로는 동남아시아 네트워크나 인도의 경이적인 첨단문명에의 실감은 너무 멀다.

백제의 겸익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한 천축 구도의 길을 다녀왔고, 신라의 10대 청소년 혜초는 '해동 변방'의 삶을 내치고 대륙으로 건너가는 그 당시의 모험에 참가해 중국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도 데칸고원을 편력했다. 이런 사실에 한반도의 확대라는 오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에 나는 세번 유럽 지중해안을 다녀왔다. 지중해 서쪽 지브롤터 일대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하던 곳이다.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이베리아반도의 리스본도 그리스인들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플라톤이 말한 행복의 섬은 아예 대서양이 아니던가.

지중해는 온갖 문명의 집합체이고 모든 종족의 흥망성쇠로 된 복합세계다. 이런 지중해를 두고 F 브로델의 지중해 사관은 일국주의의 이기적 한계를 초월한다. 역사인식에 대한 비전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나는 동북아시아 바다 위에 역사의 중심을 두고 황해 또는 동중국해 일대에 대해 지중해 사관을 말해오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더 넓게는 환태평양 연대의 해양적 역사 창출에까지 닿을지 모른다.

일본의 탁월한 역사학자 아미노(綱野)는 동북아시아 지도를 거꾸로 배치하고 황해.동해.서태평양 일대를 역사 당위의 무대로 보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사관에 대한 용기 있는 저항 행위다. 그는 그 동안의 일본사를 해체한다.

공교롭게도 한국무역협회 김재철 회장도 그의 바다생활을 기초로 한 거꾸로 본 한반도의 발상전환을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은 바다를 역사진행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어쩌면 대아시아주의가 동아시아주의에서의 장애 요인까지도 소멸시킬 대승적인 상상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나는 한반도 통일국가가 완성된 뒤 신중화주의나 일본 국수주의가 지양된 동북아 3국 연합과 나아가 아시아 전역의 다양성이라는 커다란 광장이 만들어질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오래된 문화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도 창조하는 아시아 해양의 시대를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생태적으로 죽음의 바다가 돼가고 있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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