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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 시시각각

미국식 자본주의가 끝났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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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식 자본주의가 끝장났다고 한다. 30년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했다고도 한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나오는 얘기다. 이번 사태로 정말 미국식 자본주의가 끝난 것일까.

그동안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를 고깝게 생각하던 이들에겐 이번 사태가 ‘잘코사니’로 여겨질 법도 하다. 복잡한 금융공학을 들먹이며 거액을 챙기던 월가의 잘난 투자은행들이 하나 둘씩 고꾸라질 때마다 고소하단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외환위기 때 한국에 들이닥쳐 미국식 개혁을 강요하던 미국 정부 관리들을 기억하는 사람 중엔 “잘난 척하더니 거 봐라”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전 세계에 미국식 자본주의를 설파하던 미국 정부가 이제는 자기 나라 금융위기를 수습하느라 코가 석 자나 빠졌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렇다고 불난 집을 놓고 마냥 좋아라 하거나, 불구경에 정신이 팔려서는 곤란하다. 옆집이 불에 홀랑 타버리는데 내 집만 온전할 리가 없다. 우선 옆집 불이 과연 잡힐 만한 수준인지, 아니면 싹 태울 정도인지 가늠해 봐야 한다. 영 불길이 잡히지 않을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하고 내 집부터 살려야 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옆집 불을 끄는 걸 전력으로 도와야 한다. 내 집 살린다고 옆집 부수는 데 앞장섰다가 막상 큰 피해 없이 불길이 잡히면 공연히 이웃끼리 의만 상하게 된다.

아직 미국의 금융위기가 어디까지 번질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 금융시장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다른 나라 금융위기도 다 막은 미국이 자기 나라 금융시장의 몰락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망하는 금융회사들이 속출하고, 국유화되는 회사들도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금융시장이 몰락하거나 미국 자본주의가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미국의 위기대처 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데에는 분명한 기준과 일련의 절차가 있다. 구제금융의 지원 여부는 개별 금융회사의 위기가 금융시장 전체를 위협하는 시스템 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정한다. 이에 따라 AIG와 패니메이·프레디맥은 살아났고, 리먼브러더스는 파산했다. 구제금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회사는 매각됐다. 또 위기가 전 금융권에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아예 부실채권을 사실상 무제한 사들이기로 했다. 요컨대 미국 정부는 금융위기에 질서정연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얘기다.

투자은행(IB)의 몰락을 두고 IB시대가 끝났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이번에 문제가 된 파생금융상품들은 IB업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원래 IB의 본업은 기업공개와 증자, 기업 인수합병, 채권발행 등 기업자금 조달이다. 다만 이번에 유수한 투자은행들이 간판을 내리게 된 것은 본업을 제쳐두고 위험상품 투자에 과도하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투자은행들이 이번 사태로 망하거나 팔렸다고 IB 본연의 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금융회사들이 보다 안전한 방식으로 IB업무를 계속할 것이다.

미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감독이 강화되고 일부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대한 규제가 도입되겠지만 경제 전반이 정부 주도의 규제 위주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 경기가 부진할 수는 있겠지만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서비스업과 첨단 제조업, 농업의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결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미국의 금융업도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나면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란 생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그동안 숱한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으며 발전해 왔다. 사회주의는 실패와 동시에 몰락했지만 자본주의는 실패를 극복하면서 진화해 왔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미국 자본주의도 새롭게 진화할 것이다. 미국에 금융위기가 왔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 떨 일도 아니고, 미국식 자본주의의 강점을 무작정 내팽개칠 일도 아니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