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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 활자 명맥잇는… 활판공방…

중앙일보

입력

‘철커덩 촤악, 철커덩 촤악….’

인쇄기를 빠져나온 한지(韓紙)가 한켠에 차곡차곡 쌓인다. 마르지 않은 윤활유와 잉크 냄새가 비릿하다. 한 자 한 자 한지에 박힌 글자에선 독특한 요철의 질감이 배어난다. 17일 파주출판단지 내 ‘출판도시 활판공방’(시월출판사 운영). ‘활판공방 시인 100선’시리즈 세 번째 시집인 정진규 시인의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인쇄 작업이 한창이다.

활판공방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납 활자 인쇄공정으로 책을 찍어내는 인쇄소 겸 출판사다. 시월출판사 박한수 대표와 북디자이너 정병규(정디자인 대표) 씨, 박건한(활판공방 편집주간) 시인 등이 8년 전부터 준비해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납으로 자모(字母)를 일일이 만드는 주조(鑄造)부터 60여만 자가 빼곡히 들어찬 활자 선반에서 자모를 골라내는 채자(採字), 자모를 배열하는 식자(植字·조판)와 인쇄·접지·제본에 이르기까지 활판인쇄의 전 과정이 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거의 수작업이다.

“‘자갈밭에 돌 하나 더 던지는 격의 출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회의가 들었죠.”(박한수 대표) ‘돈 되는 책’으로의 쏠림현상이 심해지는 출판업계의 흐름에서 비껴나자는 의도였다. 대안으로 찾은 활판인쇄는 사라진 활자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초 디지털 인쇄의 등장으로 활판인쇄가 자취를 감췄어요. 빠르고 매끄러운 디지털 인쇄의 장점을 누리느라 그동안 책 만들기의 기본엔 무심했던 거죠.”

책엔 활자 이외에도 활자를 만드는 재료와 인쇄기·종이,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의 손맛과 정신이 모두 담긴다는 것.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다는 얘기다. 활판인쇄는 출판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인 셈이다.

활판인쇄의 제맛을 살리기 위해 이번 시리즈엔 특수주문 제작한 한지가 쓰인다. ‘비단은 천년, 한지는 오백년’이란 옛말처럼 여러 겹으로 배접한 한지는 단단하고 견고해 보존성이 뛰어나다. 시의 맛을 더하는 한지의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도 강점이다. 얇은 한지를 두 겹으로 접어 제본을 하다보니 시집의 두께가 여느 것의 두 배다. 제작비도 만만찮다. 제본비만 따져도 일반 시집 제작비와 맞먹는다. 시집의 가격은 권당 5만원. 다행히 ‘시집도 비싸야 팔린다’는 풍문이 떠돌 정도로 지난 8월 시리즈로 첫선을 보인 이근배·김종해 시집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활판인쇄 복원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뿔뿔이 흩어졌던 5명의 주조공·문선공 등이 한자리에 모인 것. 수십 년 경력의 이들은 60~70대가 대부분이다. 이들을 이어갈 젊은층 육성이야말로 활판인쇄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당면 과제라는 것이 박 대표의 귀띔이다.

“모든 것이 코드화된 디지털 작업은 따라 하기가 어렵지 않아요. 중간과정만 그대로 따오면 되거든요. 그러나 오랜 세월 숙련과정을 거친 손기술을 전수하기란 쉽지 않죠. 아날로그 인쇄가 매력적인 이유는 장인정신이 묻어나는 손맛 때문일 것입니다.”

활판공방은 앞으로 10년에 걸쳐 한국 대표 시인 100인의 시집을 제작할 계획이다. 각 시집은 1000부 한정으로 출판된다.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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