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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은 최후의 보험금 자금 조달 국제금융망 만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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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해 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지자 박영철 고려대 석좌교수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비화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1년여가 지나 그 우려가 현실로 닥쳤다. 대학과 청와대·연구원을 거치며 이론과 실무를 두루 경험한 경제학자인 박 교수에게서 미국 금융위기의 현주소와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들어봤다.

미국 정부가 다급해진 모양이다. 7000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조성해 앞으로 2년에 걸쳐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독성 자산을 사들일 부실 자산 정리 기구를 설립할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방안도 당면한 시장 불안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뿐 금융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금융기관으로부터 털어내야 할 부실 주택 저당 증권과 이와 연관된 파생상품의 규모가 1조 5000억~2조 달러에 달한다는데 7000억 달러를 누구 코에 붙일 것인가. 일단 정부의 개입이 확정되면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심화돼 자구 노력을 게을리하는 등 부실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만일 7000억 달러가 충분치 못 하다고 시장이 판단하는 경우 부실 자산 정리 기구도 또 하나의 땜질 처방에 그칠 우려가 있다.

부실 자산 정리는 반드시 필요하나 사태를 수습할 정도로 충분한 대책이 될 수 없다. 미국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의 버블 붕괴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주택 가격이 정상 수준으로 내려와야만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그동안 금융기관들은 100만 달러짜리 주택을 건설하면 그 10배의 금융을 일으키고, 누가 무슨 상품을 개발해 누가 보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파생상품을 남발해 왔다. 금융의 난맥상을 정비하지 않는 한 위기의 불씨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주택 가격이 아직도 15% 정도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 시스템 개혁과 주택 가격의 추가적인 하락을 막을 방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금융기관의 부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미국의 금융위기는 적어도 앞으로 1~2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부실 채권을 정리하는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연방 재정 적자 증가가 불가피해졌다. 이를 달러를 찍어 보전한다면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해 달러 자산으로부터의 이탈이 가속될 것이다. 결국 달러화의 가치 하락과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의 상승이 재연되는 등 이차적인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금융위기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경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어 그 어느 나라보다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로부터 한국 경제가 받게 될 위협과 타격은 무엇인가.

첫째는 한국의 금융기관 및 기관 투자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독성 자산 규모가 예상보다 커 금융기관의 부실이 우려되는 경우 예금 인출과 투매·환매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다행히 이런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전 자산을 선호하거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자본 시장을 떠나고 국내 투자가들도 이에 뇌동해 금리가 오르고 환율의 변동 폭이 증가한다면 국내 금융시장이 불안정하게 되고 내수가 위축될 것이다. 셋째로 신용 경색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 금융기관과 기업의 외화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조달 비용이 상승하는 부담이 예상되는데 이것이 가장 우려되는 피해다. 끝으로 미국의 금융위기는 불황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데 이 경우 한국도 수출 부진으로 경기가 둔화돼 투자가 더 부진하게 되는 등 침체가 깊어질 위험이 있다.

정책 당국이 앞서 지적한 위험 경로를 차단하려면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어느 금융기관과 기관투자가들이 얼마만큼 미국의 주택 저당 증권 및 파생 상품에 투자했으며, 예상 손실 규모는 얼마이고, 이를 어떻게 흡수할 것인지를 주기적으로 발표해 자산 구조의 투명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투명성이 확보돼야만 일반투자자들의 불안을 덜어주고 시장의 신뢰를 얻게 된다. 물론 정확한 규모를 추정할 수 없고 부정확한 통계 발표에 따른 위험도 예상되나 시중에 나도는 여러 예측이나 뜬소문을 잠재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금융기관은 경기가 상승하는 국면엔 너 나 할 것 없이 대출 확장에 열을 올려 과열을 초래하고 하강 시에는 모두 대출을 회수한다. 이 병폐는 감독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외국인 투자는 환영해야 한다. 그러나 하루에 5000억원의 주식을 매수했다가 다음날 5000억원을 매도하는 등 한국의 금융시장을 놀이터로 알고 있는 외국인 투기자들의 행태를 방관만 할 수는 없다. 이런 투기자금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되고, 마음대로 활동하도록 방치해서도 안 될 것이다. 투기성 자금 이동을 억제하기 위해 외국인 장기 투자를 우대하거나 단기성 투자를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시장의 불안이 도를 넘는 경우 이런 제도를 발동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야 한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위기 전파 경로는 거시경제 정책으로 막아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환율은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일차적인 방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급에 따라 변동하도록 시장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 앞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금리가 상승하는 경우 국내 금리도 상향 조정해 그 격차를 최소화해야 한다. 재정 운영도 절도를 지켜 적자를 억제해야 한다.

물론 위에서 지적한 정도의 원칙적인 정책 운용은 충분한 대응이 될 수 없다. 특히 외화 유동성 확보는 좀 더 폭넓은 대책을 요구한다. 미국 금융 위기의 여파로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 경색이 확산되면서 외화 자금 차입 여건과 조건이 악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440억 달러에 달하는 적지 않은 수준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외환보유액은 위기를 막기 위한 최후 수단인 보험금이지 필요하면 수시로 내다 쓰고 다시 쌓는 그런 자금이 아니다. 외화 유동성 위기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면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와 투자 적격 신용 평가를 확보해 필요 시 외화 자금을 항시 조달할 수 있는 국제 금융망을 구축해야 한다.

최근 동향을 보면 대형 투자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상업은행과 기관투자가 모두 신흥시장 경제에 대한 투자와 위험도를 재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투자 기피 지역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다. 무엇보다 경상수지가 외국인 투자의 원리금 상환 능력의 기준이 되고 있는 만큼 흑자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등 성장의 걸림돌도 제거해야 한다. 물가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경기 부양도 고려해야 한다.

◆박영철(69)교수는=국내에서 손꼽히는 국제금융 분야의 권위자다. 서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68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국제금융)를 받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조사관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고려대 국제학부의 석좌교수로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87년)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2004년)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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