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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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도다리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해사한 여인과 아들이라는 소년의 얼굴이 흘러갔다.겁이 많아보이는 그 아이의 다람쥐처럼 둥근 눈이 슬펐다.
그들 모자에게 「자리」를 내주리라 생각했다.절반은 지겨운 가난을 모면하기 위해 택한 결혼이지만 차라리 가난이 청결했다.산입에 거미줄 치랴….어디든 취직하여 열심히 살면 아들 하나 키우지 못하겠는가.
을희는 침모의 아들을 떠올렸다.
출판사를 하고 있다 했다.그에게 취직을 부탁해보면 어떨까.타이피스트라도 좋고 막심부름꾼이라도 좋다.무슨 일이든 하겠으니 일터를 달라고 청해보면 어떨까.그 출판사가 아니라도 딴 직장을알아봐 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 결혼식 때 청첩장을 쓴 기억을 더듬어 주소를 따라 그의출판사를 찾았다.임시 수도의 관청들이 모여있는 한길 모퉁이 빌딩 3층에 있는 그 사무실은 쉬이 찾을 수 있었다.
『우상호 사장님 계십니까? 저는 서을희라고 합니다.』 …우상호. 을희는 그의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죽은 남편 성과 같았기 때문이다.싹싹한 얘기꾼 침모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성씨가 같은 그는 어쩐지 죽은 남편의 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마산에 출장중이십니다.오늘 밤에 오실 예정인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여자 사무원이 야무지게 물었다.
『…좀 여쭤볼 말씀도 있고,문안도 드릴겸 해서….』 어물거리며 방안을 넌지시 살폈다.그리 넓지는 않으나 대여섯명의 직원이각자 분주하게 일하는 품이 사무실을 아름다운 긴장감으로 통일하고 있었다.
주소와 이름을 적고 가라는 여직원의 말에 못이겨 메모하고 나왔다. 더이상 나다닐 힘도 없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모자는 가고 없었다.
『이리와 앉아봐.』 안방에서 남편이 불렀다.
…무슨 거짓변명을 또 하려는가.
못 들은척 하고 맥한테 먹일 우유 물을 끓이려 부엌에 들어갔다. 『의논할 게 있어.들어와 보라니까!』 부엌까지 따라와 남편이 을희의 손을 낚아채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잽싸게 안방 문을 잠그고나서 그는 옷을 훨훨 벗어 알몸이 됐다.실색을 하며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을희의 발목을 잡고 엎드려 넙죽 큰절을 했다.
『죽을 죄를 졌어.나를 죽여주시오.』 어이없어하는 을희를 껴안으며 그는 순식간에 옷을 벗기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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